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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선 다 괜찮아" 매일 밤, 워킹맘의 짜릿한 이중생활

중앙일보

2026.02.06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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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계올림픽만큼 후끈 일상 속 겨울 스포츠
연습 경기에 한창인 트리걸스 회원. 김정훈 기자
“스윽, 슥. 쾅!”

지난달 30일 오후 10시30분 서울 성북구 고려대 아이스링크. 도시가 잠들 준비를 마친 늦은 시각이지만 이곳의 공기는 한낮보다 뜨거웠다. 두꺼운 보호 장비와 헬멧으로 무장한 이들이 빙판을 가를 때마다 거친 숨소리와 얼음 지치는 소리가 실내를 가득 메웠다.

“거기서 패스! 더 빠르게!” 백우현(35) 코치의 호령이 떨어지자 퍽(Puck·고무 원반)이 총알처럼 골망을 흔들었다. 백 코치는 “훈련할 때만큼은 회원들 눈빛이 프로 선수 못지않게 강렬해진다”며 “가르쳐주는 기술을 하나라도 더 습득하려는 열정은 지도자인 내가 봐도 놀라울 정도”라고 혀를 내둘렀다.

헬멧을 벗자 땀에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환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올해로 창단 10주년을 맞은 아마추어 여자 아이스하키 동호회인 ‘트리걸스(Triggirls)’ 회원들이었다. 낮에는 직장인·학생·엄마로 생활하다가 밤이 되면 ‘빙판 위의 전사’로 변신하는 워킹맘 부주장 이수정(32)씨, 스포츠 마니아 정혜주(29)씨, 독일인 유학생 헬미히 실케(26) 등은 “이 차가운 빙판이 일주일 중 가장 뜨거운 해방구”라고 입을 모았다.


Q : 다들 본업이 있는데 밤에 힘들지 않나.
A : 이수정=“오히려 그 반대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퇴근하면 육아를 하는 워킹맘으로 살다 보면 정작 ‘나’ 자신을 잃어버린 기분이 들 때가 많다. 하지만 이곳에선 온전히 ‘플레이어 이수정’으로만 존재한다. 낮에 쌓인 스트레스를 밤에 이곳에서 전부 ‘세탁’하고 가는 기분이다. 출산 후에도 100일도 안 지나 복귀했을 정도로 이 시간이 간절했다. 직장인과 하키 선수라는 이중생활이 주는 짜릿함은 덤이다(웃음).”

A : 실케=“독일 시골 출신이라 링크가 너무 멀어 스틱을 잡기 힘들었는데 한국에 유학을 온 뒤 인터넷에서 모집 글을 보고 ‘이거다’ 싶어 즉시 달려왔다. 연구실에서 나와 장비를 갖춰 입고 빙판에 서면 나도 모르게 자신감이 샘솟는다. 팀의 일원이 된다는 소속감도 타지 생활의 외로움을 잊게 해주는 버팀목이다.”

여성 아이스하키 동호회 ‘트리걸스’ 회원들이 고려대 아이스링크에서 스틱을 모은 채 화이팅을 외치고 있다. 김정훈 기자
하지만 아이스하키를 바라보는 외부의 시선엔 여전히 편견이 존재한다. ‘거칠고 위험하다’거나 ‘돈이 많이 드는 귀족 스포츠’라는 인식이 대표적이다. 이에 대해 정씨는 “해보기 전엔 나도 같은 생각이었는데 막상 해보니 테니스나 골프보다 훨씬 ‘가성비’가 좋다”고 설명했다. “초기 장비 구매에 100만원가량 들지만 한 번 사면 10년 넘게 쓴다. 회비와 대관료를 따지면 1회에 3만원 정도라 요즘 유행하는 필라테스나 골프에 비해 결코 비싼 게 아니다. 무엇보다 타격감이 남다르다. 스틱 블레이드에 퍽이 정확히 맞았을 때 ‘깡!’ 소리가 나는데, 그 짜릿한 손맛은 쳐본 사람만 안다.”

김준환(35) 코치도 이들의 진정성에 높은 점수를 줬다. 김 코치는 “아마추어라고 해서 적당히 즐기다 가겠지 생각하면 큰 오산”이라며 “전술 이해도나 팀워크를 맞추려는 노력은 프로 선수 못지않게 치열하다”고 전했다.


Q : 아이스하키의 또 다른 장점을 꼽자면.
A : 실케=“저절로 ‘디지털 디톡스’가 된다는 점이다. 링크에 들어오면 핸드폰 볼 새가 없다. 중심 잡으랴, 날아오는 퍽 보랴, 동료들 위치 확인하랴 정신이 하나도 없다. 연구실에선 잠시도 핸드폰을 놓지 못하는데 여기선 강제로라도 디지털 기기와 멀어진다. 그런데 오직 내 몸의 감각에만 집중하는 그 몰입의 시간이 머리를 훨씬 맑게 해주곤 한다.”

트리걸스가 창단할 때만 해도 여성 아이스하키팀은커녕 여자 선수를 받아주는 곳도 드물었다. 트리걸스 주장인 최기련(43)씨는 “남자 팀에 ‘깍두기’로 껴서 뛰기도 쉽지 않은 현실에서 우리는 처음부터 과감히 ‘100% 여자팀’을 표방했다”며 “10년을 버틸 수 있었던 것도 가족 같은 끈끈함으로 뭉쳤기 때문”이라고 회고했다.

현실적인 어려움도 여전히 적잖다. 서울시내 정규 규격 링크는 손에 꼽을 정도여서 대관은 항상 모두가 잠든 심야 시간에만 가능하다. 이날 훈련도 자정이 거의 다 돼서야 끝났다. 하지만 거친 숨을 내쉬는 회원들 얼굴엔 피곤한 기색보다는 멍 자국을 훈장처럼 여기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Q : 넘어지는 게 두렵진 않나.
A : 정혜주=“사회에서는 넘어지는 걸 ‘실패’라고 여기지 않나. 직장에서도 실수하면 안 되고, 인간관계도 삐끗하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이 있다. 그런데 여기선 매일 수도 없이 넘어진다. 얼음판 위라 넘어지면 더 차갑고 아프게 느껴진다. 하지만 아이스하키 동호회를 하면서 배운 건 ‘넘어져도 괜찮다’는 점이다. 이곳에선 넘어져도 보호 장비가 나를 지켜주고 동료들이 금세 손을 내민다. ‘넘어져도 훌훌 털고 일어나면 그만’이란 단순한 진리를 몸으로 배우는 거다. 어쩌면 우리가 밤마다 이곳을 찾는 건 마음껏 넘어지면서도 또다시 일어서는, 세상에선 접하기 힘든 경험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할머니가 돼서도 이 멤버들과 함께 땀을 흘리고 싶다(웃음).”

헬멧을 벗은 그녀들의 얼굴이 붉게 상기돼 있었다. 무거운 장비 가방을 어깨에 메고 링크를 나서는 뒷모습에서도 내일 출근을 걱정하는 직장인의 모습보다 오늘을 불태운 승자의 여유가 진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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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동욱([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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