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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만원 줘도 싫어" 죽음의 운전대 못놓는 어르신 현실

중앙일보

2026.02.06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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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운전대를 놓으면 아내를 돌볼 방법이 없으니까 .”

지난 4일 서울 서초구의 한 종합병원 주차장. 주차를 마친 백발의 장용원(69)씨가 휠체어를 꺼내더니 차량 뒷좌석에 앉아 있던 아내 김모(66)씨를 조심스레 휠체어에 앉혔다. 장씨는 “하루가 다르게 눈도 침침해지고 근력도 예전 같지 않다 보니 대형 교통사고 얘기를 들으면 가슴이 철렁해진다”면서도 “병원비 부담도 만만찮은데 매번 택시비까지 감당할 여력이 없으니 결국 내가 직접 조심조심 운전하는 수밖에 없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같은 날 오후 서울 강동구의 한 식당. 식사를 마친 개인택시 기사 정모(71)씨가 운전석으로 향하더니 좌석을 눕히고 잠시 눈을 감았다. 지난해부터는 체력이 달려 야간 운행을 하지 않는 정씨는 올해는 낮에도 6시간만 운행하기로 원칙을 정했다. 정씨는 “집에만 있으면 늙은이 취급받기 일쑤지만 나오면 손님들이랑 얘기도 나누고 하루 밥벌이도 할 수 있지 않느냐”며 “일흔이 넘은 내겐 이렇게라도 운전대를 잡는 게 세상과 연결되는 유일한 끈”이라고 털어놨다.

국내 인구 다섯 명 중 한 명은 65세를 넘어선 초고령사회. 저마다의 이유로 운전대를 놓을 수 없는 고령층이 증가하면서 고령 운전자도 빠르게 늘고 있다. 국가데이터처에 따르면 65세 이상 고령 운전자는 2020년 368만 명에서 2024년엔 517만 명으로 40% 이상 급증했다. 같은 기간 전체 운전자 중 65세 이상 운전자가 차지하는 비중도 11%에서 15%로 증가했다. 이런 추세라면 2035년엔 운전자 네 명 중 한 명은 65세 이상 고령 운전자가 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그러는 사이 고령 운전자에 의한 교통사고는 더욱 가파르게 늘고 있다. 국내 교통사고 발생 건수는 2015년 23만2000건을 기록한 뒤 2024년 19만6000건으로 꾸준히 감소하고 있다. 반면 65세 이상 고령 운전자에 의한 교통사고는 2015년 2만3000건에서 2024년 4만2369건으로 10년 새 두 배 가까이 늘었다. 전체 교통사고 다섯 건 중 한 건(21.6%)은 고령 운전자 교통사고인 셈이다.

문제는 고령자 운전사고의 경우 젊은 층에 비해 ‘고위험군’ 사고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2024년 발생한 교통사고의 건당 사망자 비율은 1.3%인 데 비해 65세 이상 고령 운전자의 교통사고는 이를 웃도는 1.8%를 기록했다. 실제로 지난해 11월 인천시 부천제일시장에서 고령 운전자가 1t 트럭을 몰고 돌진한 사고로 네 명이 숨지고 18명이 다쳤다. 올해 들어서도 지난달 70대 운전자의 서울시 종각역 택시 돌진 사고로 한 명이 사망하고 15명이 중경상을 입었는 등 고령 운전자 사고가 끊이지 않고 있다.

전문가들은 신체적 노화로 인한 인지 능력 저하와 긴급 상황에서의 반응 속도 지연을 가장 우려되는 점으로 꼽는다. 한국소비자원이 고령 운전자와 비고령 운전자를 대상으로 진행한 도로 주행 시뮬레이션 시험에서도 보행자 돌발 횡단 상황에서 고령자(2.28초)가 비고령자(1.20초)보다 1.08초 늦게 반응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페달 오조작 등 운전 과정에서 발생하는 고령 운전자의 각종 실수도 교통사고의 주된 원인으로 지목된다. 삼성교통안전문화연구소에 따르면 2019~2024년 발생한 페달 오조작 사고의 25.7%가 65세 이상 운전자에 의해 발생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정부와 지자체도 고령 운전자 사고를 줄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현재 대부분의 지자체는 운전면허를 자진 반납하는 고령자에게 10만원에서 최대 50만원 상당의 교통카드나 지역 화폐를 지급하고 있다. 하지만 운전면허 반납률은 2% 수준에 머물러 있는 실정이다.

특히 거동이 불편한 고령층의 경우 병원에 다니기 위해서라도 일회성 보상만으로는 운전을 포기할 수 없다는 반응이 대다수다. 운전이 생업에 필수인 고령층에게도 운전면허 반납은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다. 서울 성북구에서 청과물 가게를 운영하는 이용수(67)씨는 “경매시장은 품목에 따라 한밤에서 새벽까지 열리는 시간이 제각각이라 직접 운전하지 않으면 장사를 할 수가 없다”며 “작은 가게 하나 운영하면서 기사를 고용할 수도 없고, 어떻게든 내가 직접 운전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라고 토로했다.

전문가들은 일괄적인 면허 반납에만 의존하기보다는 사회적 인프라의 확충과 개선이란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하고 있다. 같은 나이라고 해도 신체 능력이 천차만별인 만큼 상황에 맞는 제도적 지원으로 이동권을 최대한 보장해야 한다는 주문이다. 미국의 사례도 참고할 만하다. 미국 내 대다수 주에서는 고령자의 신체 능력에 따라 ‘야간 운전 금지’나 ‘고속도로 주행 금지’ ‘자택 반경 특정 거리 내에서만 운전 가능’ 등의 조건을 면허증에 명시하는 방식으로 현실에 맞게 제한적으로 운전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고 있다.

한국보다 빠르게 고령화를 맞이한 일본의 경우 2022년 비상 제동 장치와 페달 오조작 방지 장치 등이 장착된 차량인 ‘서포트카’만 운전할 수 있는 전용 면허제도를 도입해 효과를 보고 있다. 신체적 능력이 저하된 고령층에게도 첨단 운전 보조 장치의 도움을 받아 계속 운전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것이다. 실제로 일본 경시청에 따르면 고령자 전용 면허제도 도입 후 페달 오조작 사고가 40%가량 급감했다.

정영제 서울연구원 연구위원은 “해외 사례처럼 획일적인 면허 반납 제도에서 벗어나 유연한 면허 체계와 기술 기반 안전 지원 시스템 도입을 병행하는 새로운 접근이 필요한 시점”이라며 “정부 인증을 받은 오조작 방지 장치를 장착할 경우 보조금과 보험 혜택을 제공하는 등의 제도 개선 방안도 고려할 만하다”고 제언했다.





황건강([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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