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 개/폐회식은 현재 지구 위에서 펼쳐지는 퍼포먼스 중 최대의 행사라고 할 수 있다. 개최국들로선 자국의 문화적 수준을 세계에 과시할 수 있는 최선의 기회인 셈. 당연히 모든 역량이 집중된다.
21세기 이후 그 경쟁은 치열함을 더해갔다. 그리스 신화를 소재로 삼은 2004년 아테네 올림픽 개회식 퍼포먼스는 왜 그리스가 유럽 문명의 원천인지를 확인시켜준 역대 최고의 무대로 꼽힌다. 2012년 런던 개회식도 비틀스의 리더 폴 매카트니, 〈해리 포터〉의 저자 J K 롤링 등 압도적인 출연진의 화력 시범이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2018년 평창 올림픽도 한국 고유의 인면조 퍼포먼스와 공중에서 펼쳐진 드론 쇼, 그리고 K팝 아티스트들의 참여로 한국의 이미지를 첨단 문화 강국으로 부각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유명 영화감독들이 연출자로 나서는 경우도 흔해졌다. 아무래도 영상의 비중이 커지고, 전체적인 스토리텔링을 조율하는 데 강점이 있기 때문. 2012년 런던의 대니 보일이 대표적이고,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도 자국 감독 페르난도 메이렐레스('시티 오브 갓', '두 교황' 감독)를 기용했다. 20세기 중국 영화의 상징인 장이머우도 베이징에서 2008년 하계, 2022년 동계 올림픽 퍼포먼스를 맡았다.
반면 올림픽 무대를 통해 역량을 과시한 스타 프로듀서들도 적지 않다. 평창 올림픽은 송승환과 장유정이 연출을 맡았고, 2024년 파리 올림픽은 연극/이벤트 연출가 토마졸리를 통해 혁신을 주도했다. 거의 모든 행사가 스타디움 안에서 펼쳐져 온 일반적인 대회와는 달리, 파리 올림픽 개회식은 도시 전체를 무대로 바꿔 다양한 시공간을 하나로 연결하는 놀라운 구상을 실현했다.
이번 밀라노·코르티나 올림픽 개회식 연출자는 마르코 발리치. 2006 토리노 동계올림픽 행사에 참여했고, 2022년 카타르 월드컵 개막 행사에 이어 이번 대회의 총연출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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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성화대, 아르모니아
발리치가 선언한 이번 행사의 주제는 '아르모니아(Armonia)'. 영어로는 하모니, 즉 조화와 균형을 말한다. 복잡다단한 21세기 세계정세를 바라보아도, 세대 간-계층 간 균열이 심각한 사회 분위기를 봐도 매우 시의적절한 주제다. 특히 로마 시대 이후 1861년 통일 전까지 다양한 군소 국가로 나뉘어 있던 이탈리아의 역사에서 아르모니아는 매우 중요한 개념일 수밖에 없다.
이번 대회는 이탈리아 북서부의 대도시 밀라노(실내경기)와 동부 베네토의 산악 도시 코르티나 담페초(스키 등 야외 경기)가 공동 개최하며, 성화대도 두 도시에 설치된다. 평창 올림픽을 비롯해 올림픽이 주변의 몇 개 도시 경기장에서 분산 개최되는 경우는 흔했지만 이번처럼 아예 두 개의 성화대가 설치된 것은 역대 처음. 그러다 보니 아르모니아라는 주제는 더욱 의미를 갖는다.
이탈리아 베네토 주가 고향인 방송인 알베르토 몬디는 "코르티나 담페초는 온 가족이 여름철마다 평지의 더위를 피해 놀러 갔던 곳"이라며, 돌로미티의 산속에 둘러싸인 숲속에서 버섯을 따며 보냈던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 돌로미티의 중심인 코르티나 담페초는 여름에는 피서지로, 겨울에는 스키 리조트로 유명한 휴양지. 최근 돌로미티를 찾는 국내 여행객들에게도 인기 있는 방문지가 되고 있다. 1956년에도 동계 올림픽이 열렸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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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프닝: 머라이어 캐리는 왜?
밀라노 산시로 경기장에서 개회식 시작과 함께 이탈리아가 선택한 아이콘은 18세기 조각가 안토니오 카노바. 2006년 토리노 대회 때 슈퍼모델 에바 헤르치고바가 토리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을 재현해 화제를 모았다면, 이번에는 라 스칼라 극장 무용단이 카노바의 '큐피드와 프시케'를 재현했다. 화려한 이탈리아 고전 문명의 재현이란 면에서 연출가 발리치의 일관된 취향을 드러낸 장면이다.
이어 이탈리아 오페라를 대표하는 베르디-푸치니-로시니의 소개, 단테에서 콜로디(『피노키오』 작가)에 이르는 문학의 거장들, 다빈치와 미켈란젤로 등 르네상스 시대의 거인들을 훑는다. '예술의 나라 이탈리아'에 감탄하게 되는 순간들. 그런데 그 뒤를 이어 머라이어 캐리가 등장한다.
캐리는 이탈리아의 국민가요로 꼽히는 '파랗게 물든 푸르름 속에서(NelBlu, DipintoDiBlu)'와 자신의 신곡 '불가능은 없다(Nothing is Impossible)'를 불렀지만, 가창력은 전성기에 크게 미치지 못했다. 이번 캐리의 등장 의미는 세계인이 '볼라레(Volare)'라고 알고 있는 노래의 원제가 '파랗게 물든 푸르름 속에서'라는 것을 알리는 정도라고 봐야 할 것 같다. 어째서 행사 제작진은 이탈리아 혈통임을 자랑하는 마돈나나 레이디 가가, 아리아나 그란데를 초대하지 않은(또는 못한) 것일까.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다.
이어 등장한 조르지오 아르마니. 생존해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불행히도 그는 2025년 세상을 떠났다. 그에 대한 헌정으로 아르마니 의상을 입은 모델들이 이탈리아 국기를 게양하는 장면을 보면서, 패션의 나라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대중적 아이콘은 이제 누구일까를 잠시 생각했다. 도나텔라 베르사체, 미우치아 프라다가 과연 아르마니의 카리스마를 메울 수 있을까.
국기 게양과 함께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여가수 라우라 파우지니가 국가 '마멜리 찬가 InnodiMameli'를 불렀다. 이 노래의 작사가 고프레도마멜리는 1847년, 20세의 나이로 이 시를 쓰고 2년 뒤 가리발디와 함께 이탈리아 통일을 위해 싸우다 전사했다. 같은 노래를 밀라노에서는 라우라파우지니가, 코르티나 담페초에서는 산악 합창단이 동시에 부르는 장면도 이 대회의 주제인 아르모니아를 되새기게 했다.
마지막은 두 개최지의 만남을 상징하는 '도시와 산'. 19세기 이탈리아의 국민 시인 자코모 레오파르디의 시 '무한'을 영화 '수부라 게이트' 등으로 잘 알려진 배우 피에르프란체스코 파비노가 낭송하고, 도시(밀라노)와 산(코르티나 담페초)의 만남을 상징하는 단체 퍼포먼스에 이어 공중에서 다섯개의 원이 만나 오륜을 형성하는 것으로 전반부가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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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단 입장: 진격의 몽골
모든 올림픽 개막식의 입장 순서는 동일하다. 올림픽의 종주국 그리스가 첫 번째 입장, 개최국은 마지막으로 입장한다. 그 외의 국가들은 이름 순서로 입장하는데, 규정상 그 '이름'은 개최국 언어의 사전적 순서를 따른다. 즉 한국에서 개최되는 대회는 가나다순, 유럽에서 열리는 대회는 알파벳 순이다. 그런데 이번 대회는 그리스의 입장 순서에 피켓걸 혼자 등장했다. 그리스 선수단은 모두 코르티나로 이동해 있었기 때문. 그래서 텅 빈 트랙을 피켓걸 혼자 걷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아무리 정치적 의미를 배제하는 올림픽이라 해도 관객의 감정은 어쩔 수 없는 일. 단 4명인 이스라엘 선수단이 입장할 때 '우우'하는 야유가 일었다. 최근 중동 분쟁과 관련, 이스라엘의 올림픽 참여를 막아야 한다는 문제제기가 있었던 것과 무관하지 않은 듯. 또 미국 선수단의 입장 때에는 다른 나라와 별 차이 없는 박수가 나왔지만, 선수단 격려차 방문한 JD 밴스 미국 부통령이 화면에 잡힐 때에는 역시 야유가 이어졌다.
밀라노 지역의 대표적인 DJ 메이스(Mace)가 주도하는 입장 분위기에서 각국 선수단은 클럽에 간 듯 활기를 뽐냈는데, 그 분위기에서 한국과 중국, 일본의 동아시아 3국은 아무 특색 없는 밋밋한 패딩 재킷 차림으로 입장해 아쉬움을 남겼다. 이와 대조적으로 아시아 국가 중 유난히 미적 감각을 과시한 것이 몽골. 몽골 선수단은 캐시미어로 만든 델(Deel, 몽골식의 전통 로브) 차림으로 박수갈채를 받았고, 이 단복을 디자인한 고욜 캐시미어라는 몽골 브랜드도 온라인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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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반부: 안드레아 보첼리의 '잠들지 말라'는 최선의 선택인가?
102년째를 맞은 동계올림픽의 지난 한 세기를 돌아보는 영상과 함께 다양한 퍼포먼스가 펼쳐졌는데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이탈리안 제스처'. 손동작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데 익숙한 이탈리아 문화의 특징을 배우 브렌다 로디지아니가 우아하고 코믹하게 보여줬다. '이탈리아인과 대화하기 위해서는 언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어떤 무엇보다 잘 설명해주는 퍼포먼스였다.
후반부의 하이라이트는 안드레아 보첼리의 등장과 아리아 '잠들지 말라 Nessun Dorma' 열창. 세계적인 팝페라 가수 보첼리의 등장에 관객은 갈채를 보냈지만 아무래도 2006년, 토리노 동계 올림픽 개회식 무대에서 같은 노래를 부른 것이 루치아노 파바로티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작고한 파바로티를 잇는 이탈리아 오페라를 상징하는 위대한 테너가 과연 보첼리였어야 했을까.
이어 튀니지 출신의 밀라노 힙합 아티스트 갈리가 이탈리아 현대 시인인 잔니 로다리의 '프로메모리아'를 낭송해 전반부 피에르프란체스코 파비노의 〈무한〉 낭송과 균형을 맞췄고,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의 할리우드 스타 샤를리즈 테론이 UN 평화 대사로서 화해와 이해를 담은 '넬슨 만델라의 메시지'를 전해 우아함을 빛냈다.
테론의 등장에 이은 8인의 올림픽 기수단을 각국의 민권/평화운동가들로 구성한 것은 올림픽이 지역 행사이면서 국제 행사임을 상징하는 연출. 난민 선수단으로 2024 파리 올림픽에 참여한 카메룬 출신의 신디 은감바, 일본의 반핵 운동가 아키바 타다토시 등의 구성 속에, '통가맨'으로 유명한 피타 타우파토푸아가 끼어 있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타우파토푸아는 지난 2018년 평창 올림픽 개회식 때 웃통을 벗은 근육질의 모습으로 화제가 됐던 바로 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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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 기 게양, 감춰진 성화 점화자
올림픽 기 게양과 함께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메조소프라노 체칠리아 바르톨리가 중국 피아니스트 랑랑의 반주로 '올림픽 찬가'를 불렀다. 랑랑은 자국에서 열린 2008 베이징 올림픽에 '미래의 희망'을 상징하는 인물로 등장한 이후 2014 인천 아시안게임, 2024 파리 올림픽 개회식에 등장해 이번까지 올림픽 개회식만 세 차례 등장, '올림픽 전문 아티스트'의 이미지를 굳힌 셈이다.
이번 대회에서도 마지막 주제는 '미래와의 조화'. 이탈리아가 낳은 세계적인 천체물리학자 마르게리타 헤크를 추모하며 전 유럽우주국(ESA) 우주비행사 사만다 크리스토프레티가 등장, 한 소녀의 어깨를 감싸며 우주와 미래에 대한 의지가 세 명의 여성을 통해 승계되는 구도를 표현했다.
마지막까지 베일에 가려져 있던 성화 점화자는 총 3명. 밀라노의 개선문(Arce della Pace)앞 성화대에서는 이탈리아 동계 스포츠의 전설 알베르토 톰바와 데보라 콤파뇨니가 점화에 나섰다. 톰바는 1988-1998에 걸쳐 4회의 올림픽에서 금 3, 은 2개의 메달을 딴 스키의 전설. 콤파뇨니는 1992, 1994, 1998, 3회 올림픽에서 연속으로 금메달을 딴 최초의 스키 선수로 기록되어 있다.
코르티나에서는 현역 최고의 다운힐 선수 소피아 고지아가 점화를 맡았다. 이번이 세 번째 올림픽 참가인 고지아는 2018 평창 올림픽 활강에서 금메달을, 2022 베이징에서는 은메달을 따냈다. 두 도시에서 세 명의 점화자가 거대한 구형 성화에 점화하면서, 2026 밀라노-코르티나 동계 올림픽은 공식적으로 막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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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평
아르모니아라는 주제는 적절했고, 과거와 현재의 조화는 설득력이 충분했다. 고대에서 르네상스를 거쳐 근대까지 유럽 문명의 선도자였던 이탈리아의 위대한 문화적 자산과 그 자산의 현대적 계승, 미래로 이어지는 의미에 충실한 연출이 돋보였다. 두 개의 공동 개최 도시가 가진 서로 다른 환경과 역사적 맥락을 연결하는 시도도 훌륭했다. 단 2018년 평창의 드론 활용, 2014년 파리의 전 도시 공간 활용 같은 파격적인 시도는 없었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출연자들. 확실히 루치아노 파바로티, 조르지오 아르마니 사후 이탈리아가 자랑스럽게 내놓을만한 국제적인 대중문화 아이콘이 약화되었다는 것이 드러났다. 2006년 토리노 동계올림픽 때만 해도 소피아 로렌, 이사벨라 로셀리니, 에바 헤르치고바(체코 출신이지만 이탈리아 패션의 뮤즈로 오래 활동) 같은 아이콘들이 등장했던 반면 이번에는 그런 자리를 메워줄만한 대안이 보이지 않았다.
알려진 인물이 드물다 보니 파바로티가 맡았던 역할을 안드레아 보첼리에게 맡기는 무리수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이 자리는 현역 최고의 이탈리안 테너인 비토리오 그리고로나 프란체스코 멜리가 서야 하지 않았을까. 머라이어 캐리 대신 확실한 이탈리아계 스타인 레이디 가가나 아리아나 그란데를 초대하지 못한 것도 여러모로 아쉬움을 남긴다. 모니카 벨루치를 개회식 무대에서 볼 수 없었던 것도 아쉽지만, 신성 마틸다 데 안젤리스는 이번 개회식을 통해 이탈리아의 새로운 아이콘으로 성장할 가능성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