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범죄자 제프리 엡스타인 수사 관련 문건 ‘엡스타인 파일’을 둘러싼 후폭풍이 거세다. 지난해 11월 미 상·하원이 가결하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서명한 ‘엡스타인 파일 투명성 법’에 따라 미 법무부가 파일 공개를 시작하며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모양새다.
공개된 파일에는 트럼프 대통령, 빌 클린턴 전 대통령 등 미 정계 거물은 물론,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회장,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 등 재계 유력 인사들의 이름도 포함됐다. 파일에 이름이 오른 인사들은 하나같이 엡스타인의 범죄 사실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며 선을 긋고 있지만, 논란은 커지고 있다. 사건의 핵심 인물인 엡스타인이 고인인 탓에 의혹이 해소되기보다는 오히려 증폭되는 양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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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엡스타인?
엡스타인은 본래 사립학교 교사였으나 1976년 투자은행 베어스턴스에 입사하며 금융계로 진출했다. 베어스턴스에서 승진 가도를 달리던 그는 1981년 독립해 10억 달러(약 1조45250억원) 이상 초고액 자산가 대상 투자회사를 설립했다. 이후 막대한 부를 축적해 뉴욕 맨해튼 저택, 전용기 나아가 미국령 버진아일랜드 내 본인 소유 섬 등 호화 자산을 보유한 억만장자가 됐다.
성공한 금융인으로 이름을 알린 그의 실체가 드러난 건 2005년이다. 한 14세 소녀의 부모가 그를 성추행 혐의로 신고하면서다. 피해자는 30여 명에 달했고 대부분 엡스타인 소유 저택에서 성폭력을 당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에 엡스타인은 2006년 미성년자 성매매 유도 및 매춘 등 혐의로 기소됐다.
그러나 2008년 6월 그는 플리바게닝(유죄·형량 협상)을 통해 중범죄 기소를 피했다. 상대적으로 가벼운 혐의만 인정돼 18개월 형량을 선고받았다. 복역 기간에도 낮에는 외부 활동을 할 수 있는 특혜를 받았다. 출소도 앞당겨져 2009년 7월 출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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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죽음과 음모론
‘성범죄’ 기록이 엡스타인의 화려한 생활을 막지는 못했다. 그의 핵심 자산은 돈이 아닌 ‘관계’였기 때문이다. 그는 1980년대부터 초부유층 고객들을 위해 도난당한 자산을 되찾아주는 등 궂은 일을 도맡아 하며 신뢰를 쌓았다. 또 뉴욕 예술 아카데미(New York Academy of Art) 이사회에 합류하는 등 유력 인사들과의 접점을 넓힐 수 있는 통로를 끊임없이 찾아 나섰다.
엡스타인은 부를 이용해 권력자들이 원하는 ‘환경’을 제공했고, 이들의 어두운 사생활은 곧 약점이 돼 엡스타인에 엄청난 ‘권력’을 안겨줬다. 인맥이 늘어날수록 영향력은 기하급수적으로 커졌다. 마침내 그는 권력자들 사이에서 다리를 놓는 위치에까지 올라섰다.
그러던 중 그는 2019년 7월 미 연방수사국(FBI)과 뉴욕 경찰에 의해 체포된다. 2018년 트럼프 1기 행정부 당시 노동부 장관 지명자인 알렉산더 아코스타가 과거 엡스타인과의 사법거래를 성사시킨 연방검사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한동안 잊혔던 엡스타인 사건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의 행각이 밝혀진 데는 미국 사회 전반에 퍼진 ‘미투’(MeToo) 운동 영향이 컸다. 피해자들이 잇따라 증언에 나섰고, 여론의 압박 속에 FBI는 엡스타인에 대한 재수사에 착수해 그가 조직적으로 저질러온 범죄의 실체가 드러났다. 본인 소유 섬에서의 성 착취 등이 밝혀지며 엡스타인은 미성년자 성 착취 및 성매매 혐의 등으로 체포돼 뉴욕 연방 구치소에 수감됐다.
그러나 엡스타인은 체포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구금 중 사망했다. 당국은 그가 자살했다고 공식 발표했지만 핵심 피의자가 재판에 서기 전 사망해 사건이 종결되며 미국 사회 전반에 거센 의혹이 일었다. 엡스타인이 유력 인사들과 폭넓은 교류 관계를 맺어왔기에 각종 음모론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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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트럼프는 왜?
엡스타인의 석연치 않은 죽음을 활용한 이가 트럼프 대통령이었다. 트럼프는 2024년 대선 당시 관련 음모론을 활용해 지지층 결집에 나섰다. 그의 죽음 배후에 민주당 기득권 세력 ‘딥 스테이트’가 있고, 조 바이든 당시 행정부가 이를 들추기 꺼려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트럼프는 대통령에 당선되면 엡스타인과 교류한 인사 명단 등을 공개하겠다는 공언도 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 당선 이후인 지난해 7월 미 법무부는 엡스타인의 사인은 자살이고 명단은 없다고 공지했다. 그러자 진영을 불문하고 비판이 쏟아졌다. 트럼프 대통령의 핵심 지지층 마가(MAGA·Make America Great Again) 세력도 등을 돌리며 ‘트럼프도 엡스타인의 범죄를 알고 묵인한 것 아니냐’는 주장까지 제기됐다.
파일 공개 요구가 거세지자 결국 의회 표결을 거쳐 트럼프 행정부는 파일을 공개했다. 파일에는 트럼프 대통령과 엡스타인의 친분을 유추할 수 있는 사진과 이메일 기록 등이 담겼다. FBI가 취합한 트럼프 대통령과 엡스타인에 관한 10여 건의 제보 요약본도 포함됐다. 연루 의혹이 잦아들지 않자 트럼프는 지난 2일 소셜미디어 트루스소셜에 “나는 엡스타인과 친하지 않았다”며 “(연루설을 제기하는) 급진 좌파 중 일부는 내가 고소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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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빌 클린턴, 빌 게이츠, 일론 머스크…누가 또 거론되나
엡스타인 파일에 거론되는 인사들의 면면은 화려하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엡스타인의 전용기 ‘로리타 익스프레스’를 여러 차례 이용했다. 신원 미상의 여인과 함께 찍은 사진도 공개됐다. 논란이 증폭되자 클린턴 전 대통령과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 부부는 엡스타인 파일 관련 미 하원 감독위원회 조사에 출석해 증언하기로 했다.
최근 신임 미국 연방준비제도 이사회 의장으로 지명된 케빈 워시도 곤욕을 치르고 있다. 한 홍보담당자가 엡스타인에게 보낸 이메일 속 ‘2010년 크리스마스 모임 참석예정자 명단’에 그의 이름이 포함됐기 때문이다.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장관과 일론 머스크는 엡스타인 소유 섬 방문을 준비한 정황이 드러났다.
빌 게이츠도 엡스타인을 여러 차례 만난 것으로 드러났다. 공개된 파일에는 게이츠가 여성들과 함께 찍은 사진도 포함됐다. 외신에 따르면 엡스타인이 2013년 작성한 이메일 초안에는 ‘빌 게이츠가 러시아 여성들과 성관계를 가진 뒤 성병에 걸렸고, 이를 당시 아내에게 숨기기 위해 항생제를 구해달라고 요청했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고(故)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차남이자 현 찰스 3세 국왕의 동생인 앤드루 전 왕자는 엡스타인 사건에 연루되며 왕자 칭호와 작위를 박탈당했다. 2010년 엡스타인을 버킹엄궁으로 초대했음을 시사하는 내용이 담긴 이메일이 공개되면서다. 앤드루 전 왕자는 이메일에서 “궁에서 저녁을 먹으며 사적인 시간을 보낼 수 있다”고 제안했다. 또한 엡스타인이 20대 러시아 여성을 소개해 주겠다고 하자 “기쁘다”고 답한 정황도 담겼다.
세계적 석학 중 하나로 꼽히는 언어학자 놈 촘스키도 엡스타인과의 친분이 드러났다. 2019년 엡스타인이 변호사 겸 언론대응 담당자에게 보낸 이메일엔 그가 촘스키로부터 받은 조언이 담겼다. 내용에 따르면 촘스키는 엡스타인에게 “각종 논란을 무시하라”고 조언했다. 엡스타인에게 아파트 구입 등 재무 관련 조언을 구한 것으로도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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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 엡스타인과 러시아…엡스타인은 러시아에 포섭된 고정간첩?
영국 텔레그래프는 지난 1일 미 법무부가 지난달 30일 추가로 공개한 엡스타인 파일을 분석해 “엡스타인이 러시아를 위해 활동한 간첩일 수 있다는 의견이 제기된다”고 보도했다. 매체는 추가 공개된 문건 300만 건, 사진 18만 건, 영상 2000여 건 중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이름이 거론된 문서는 1056건, 모스크바가 언급된 문서는 9000여 건에 이른다고 전했다.
문건에 따르면 엡스타인은 푸틴 대통령을 직접 만난 것으로 추정된다. 텔레그래프는 “엡스타인이 체코슬로바키아 출신 유대인인 영국 미디어 사업가 로버트 맥스웰을 통해 옛 소련 정보당국에 포섭된 것으로 보인다”며 “둘 사이 만남은 러시아 정보기관의 지원을 받는 석유 재벌에 의해 주선된 것으로 알려졌다”고 전했다. 맥스웰의 딸 길레인 맥스웰은 엡스타인의 연인이었으며 2020년 7월 엡스타인의 여러 성범죄를 조력한 혐의로 체포돼 2022년 6월 2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다.
텔레그래프는 엡스타인이 러시아 출신 성매매 여성을 모집한 점을 들어 유력 인사가 성매매 여성과 성관계하는 영상을 촬영한 뒤 이를 협박 수단으로 삼는 ‘콤프로마트’ 작전(정적에 대한 약점 자료를 수집하는 러시아식 공작)을 수행했을 가능성도 시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