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이인환 기자] 4번째 올림픽에 나선 맏형이 해줬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피 땀 눈물이 있었다.
김상겸은 8일(한국시간) 이탈리아 손드리오주의 리비뇨 스노 파크에서 열린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 스노보드 평행대회전 결승에서 벤야민 카를(오스트리아)에 0.19초 차로 패하며 최종 2위를 기록했다.
블루코스를 탄 김상겸은 좋은 스타트를 선보였고, 1차 측정 구간을 0.17초 빨리 통과했다. 다만 뒤이어 삐끗하는 아쉬운 실수가 나오면서 카를에게 뒤처졌다.
김상겸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속도를 내며 역전에 성공했다. 하지만 마지막 구간에서 카를에게 재역전을 허용하며 0.19초 늦게 피니시 라인에 들어왔다. 모두가 박수를 보낸 쾌거지만, 김상겸은 아쉬운 듯 환하게 웃진 못했다.
그럼에도 기대 이상의 성적임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김상겸은 이전까지 세계선수권대회와 3차례 올림픽에서 한 번도 시상대에 오르지 못했지만, 4번째 올림픽 도전에서 기어코 일을 내는 데 성공했다.
이 종목의 기대주는 이상호였다. 그는 한국 설상 최초의 올림픽 메달의 주인공이다. 2018 평창 대회에서 은메달을 목에 건 바 있다.
이상호는 이번 대회에서 대한민국 설상 역사상 두 번째 메달을 겨냥했다. 그는 올림픽 바로 직전에 열린 2025-2026 국제스키스노보드연맹(FIS) 알파인 월드컵 로글라 대회에서 평행대회전 정상에 오르며 기대감을 키웠다. 하지만 아쉽게도 16강에서 여정을 멈췄다.
앞서 열린 16강전에서 이상호는 안드레아스 프롬메거(오스트리아)보다 0.17초 차로 패하며 8강 진출에 실패했다.
앞서 이상호는 1차 예선에서 블루코스 43초21, 2차 예선에서 레드코스 43초53을 기록하며 합계 1분26초74로 6위에 올랐다. 상위 16명이 결선에 통과하는 만큼 가벼운 예선 통과였다. 이번이 6번째 올림픽 무대인 베테랑 프로메거는 1분27초40, 전체 11위로 예선을 뚫고 올라왔다.
이상호도 1980년생 프로메거에게 덜미를 잡히며 16강에서 예상치 못하게 탈락하고 말았다. 초반 밀리던 그는 중반부 안정적으로 활주를 펼치며 역전하는가 싶었지만, 마지막 속도전에서 밀리며 결승선을 0.17초 늦게 들어왔다. 8년 만의 메달 획득 꿈이 좌절된 이상호는 침통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상호가 무너졌지만 김상겸은 맏형의 투지를 보여줬다. 그는 예선에서 블루코스 43초74, 레드코스 43초44로 1·2차 합계 1분27초18를 기록하며 8위를 차지, 결선 토너먼트에 올랐다.
16강에선 행운까지 따랐다. 김상겸은 3조에서 슬로베니아의 잔 코시르와 16강전을 치렀다. 레이스 도중 코시르가 넘어지면서 김상겸이 8강행의 주인공이 됐다.
이로써 2018년 대회에서 15위에 올랐던 김상겸은 생애 올림픽 최고 성적을 거두게 됐다. 그는 8강에서 개최국 이탈리아의 에이스 롤란드 피슈날러와 맞붙었다. 기록을 따지면 사실상 비교가 안되는 상대.
8강에서도 행운의 여신이 김상겸에게 미소를 지어줬다. 피슈날러는 예선에서 합계 1분25초13로 1위를 기록하며 결선에 오른 강자다. 게다가 그는 개최국 선수인 만큼 홈 어드밴티지까지 안고 있었다.
다만 피슈날러는 블루레인에서 레드레인으로 바꾸는 선택을 내리며 많은 이들을 의아하게 했다. 그리고 이는 김상겸의 예상 밖 승리로 이어졌다.
블루레인을 타게 된 김상겸은 다소 뒤처지며 출발했지만, 중간에 속도를 내며 앞서 나갔다. 그리고 후반부 피슈날러가 흔들리면서 완주를 포기했고, 43.24로 피니시 라인을 통과한 김상겸이 4강 진출의 주인공이 됐다.
해설진도 "이변에 이변"이라고 말할 정도로 기분 좋은 반전이었다. 기세를 탄 김상겸은 4강에서 테르벨 잠피로프(불가리아)를 꺾고 결승에 올랐다.
은메달을 목에 걸면서 김상겸은 동·하계를 통틀어 한국의 통산 올림픽 400번째 메달 주인공이라는 뜻깊은 기록까지 남겼다.
지금까지 한국은 하계올림픽에서 320개(금 109개, 은 100개, 동 111개), 동계올림픽에서 79개(금 33개, 은 30개, 동 16개)의 메달을 획득했다. 그리고 김상겸이 여기에 하나를 추가하면서 400개를 달성하게 됐다.
한국의 이번 대회 첫 메달이기도 하다. 한국은 이탈리아 땅에서 아직 메달을 수확하지 못하고 있었다. 선수단 맏형인 김상겸이 가장 먼저 시상대에 오르면서 메달 레이스의 스타트를 끊게 됐다.
이렇게만 보면 희대의 럭키 가이다. 하지만 이 은메달의 배경에는 무시무시한 노력이 이어졌다. 1989년생 김상겸의 스노보드를 향한 열정이 이번 은메달의 밑바탕이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상겸은 초등학교 1~2학년 시절 천식으로 고생하던 자칭 ‘허약한 아이’였다. 천식이 심해 2주간 병원 신세를 지기도 했다. 보다못한 부모가 건강을 위해 운동을 권유하면서 초3부터 육상을 시작했다.
꾸준한 운동으로 건강을 되찾은 그는 중학교 3학년이 될 즈음엔 키 178cm의 덩치 있는 학생 선수가 됐다. 중2 때 학교 내 스노보드부가 만들어지면서 본격적으로 보드를 타게 됐다.
어려서부터 육상 80m와 멀리뛰기, 높이뛰기 등 단기간에 폭발적으로 힘을 쏟아내는 운동을 해왔던터라 30~40초에 승부를 결정짓는 스노보드에서 금방 탁월한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스노보드에 빠진 김상겸은 자신의 인생 진로를 정했다. 한체대에 입학했다 졸업하고 난 당시 김상겸은 실업팀에 없어 생계유지가 어려웠을 당시 막노동을 하면서도 운동에 대한 열정을 이어갔다.
김상겸은 소치, 평창, 베이징에 이어 자신의 4번째 올림픽까지 느리지만 성실하게 달려왔다. 누구보다 성실했던 김상겸은 2014 소치 동계 올림픽에서 예산 탈락, 평창서는16강, 베이징에서는 24위로 예선 탈락을 기록했다.
1989년생이라는 노장의 나이에 자신의 네 번째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들어올린 것 자체가 김상겸이 이어온 꾸준한 노력이 나타난 것이라는 평가다.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