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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중앙] 구국의 영웅 충무공부터 고뇌하는 인간 이순신까지 입체적으로 만나요

중앙일보

2026.02.08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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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난중일기 말고
‘이순신’ 하면 무엇이 떠오르나요

시대가 혼란할 때마다 가장 먼저 떠올리는 위대한 인물 중 하나가 바로 이순신 장군입니다. 잊을 만하면 이순신 관련 영화와 드라마가 방영되며 이순신에 대한 관심은 사그라들지 않아요. 우리나라의 국격이 높아진 오늘날에는 세계 각국에서 이순신을 알고 놀라는 현상도 유튜브 등 SNS를 통해 볼 수 있죠. 보통 전쟁의 영웅으로만 이순신을 기억하고 막연하게 알고 있기도 하는데요. 이번 설날 연휴와 봄방학에는 애국충정의 영웅 이순신부터 인간 이순신에 대해 더욱 자세히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건 어떨까요. 2편에 걸쳐 연재됩니다.

① 구국의 영웅 충무공부터 고뇌하는 인간 이순신까지 입체적으로 만나요
② 서울 한복판부터 전국 곳곳서 만나는 이순신
이서준·정하은·홍원교(왼쪽부터) 학생기자가 애국충정의 영웅 이순신부터 인간 이순신에 대해 더욱 자세히 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우리 국민에게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냐고 물어볼 때 가장 많이 꼽히는 인물이 바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어린 시절 누구나 한번쯤은 이순신 전기를 읽거나 이순신 장군이 쓴 『난중일기』에 대해 들어 봤으며, 이순신 관련 드라마와 영화를 봤을 텐데요. 이순신은 불가능의 순간을 가능으로 만든 이름입니다. 패배와 좌절, 압도적 위기 앞에서 흔들리면서도 무너지지 않으려는 고뇌, 그리고 다시 일어서는 결단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큰 울림을 주죠.

하지만 영웅 이순신이 아닌 인간 이순신에 대해 잘 알 수 있는 기회는 생각보다 많이 없었는데요. 드라마·영화·소설 등 창작물이 그린 이순신이 아닌 실제 역사적 자료를 통해 그의 인생을 입체적으로 조명하는 특별전 ‘우리들의 이순신’이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다는 소식에 소중 학생기자단이 방문했습니다.


역사적 사료로 조명하는 ‘우리들의 이순신’
충무공 이순신 탄신 480주년과 광복 80주년을 기념하여 3월 3일까지 개최되는 이번 전시는 『난중일기』와 『임진장초』 등 이순신이 직접 남긴 기록을 중심으로 전쟁 영웅을 넘어 인간 이순신의 내면과 감정, 그리고 시대가 만들어온 상징으로서의 이순신을 입체적으로 조명하죠. 이순신 종가와 일본·스웨덴 등 국내외 45곳에서 온 국보 6건(15점), 보물 39건(43점) 등 258건(369점)에 달하는 유물을 선보이는 사상 최대 규모의 이순신 전시입니다.
소중 학생기자단이 애국충정의 영웅 이순신부터 인간 이순신에 대해 더욱 자세히 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난중일기』를 비롯한 이순신 종가 유물 20건 34점의 진본이 이렇게 한꺼번에 서울에서 선보이는 일은 처음이에요. 이서준 학생기자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이순신을 단독 주제로 다룬 첫 전시회라고 알고 있습니다. 이전의 이순신 관련 전시와 비교해 이번 전시만이 가진 특징이나 차별점이 있나요”라고 질문했습니다. 유새롬 학예사가 “현충사에서 하는 상설 전시가 있지만 전국의 전시관을 보면 체험이나 영상 등 대부분 복제품으로 전시되고, 관련 유물로 전시한 건 거의 처음이다시피 해요. 대부분 진본 유물이고 그만큼 또 많은 자료가 나왔습니다”라고 답했죠. 개인을 포함한 45개 처의 협조로 이루어진 이번 전시는, 다양한 시대와 국가의 자료를 한자리에 모아 전쟁의 기록, 인간 이순신의 이야기, 그리고 시대가 만든 상징을 동시에 조망합니다.

홍원교 학생기자가 “여러 유물 확보 과정에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무엇인지” 궁금해했죠. 유 학예사가 “전시 준비할 때 가장 중요하고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 중의 하나가 유물 섭외예요. 소장자에게 대여 허가를 받는 것까지가 좀 어려운데 이순신 장군 종가 유물 같은 경우는 현충사 관리소의 수장고 밖으로 나간 적이 거의 없고 대여가 거의 되지 않았던 유물이라는 점에서 설득하고 허락을 받기까지가 제일 어려웠습니다”라고 설명했어요.
‘우리들의 이순신’ 전시 도입부 실감 영상은 우리 바다에서의 전쟁에 임하는 이순신의 결의를 시각적으로 전달한다.

전시 도입부의 실감 영상은 전쟁에 임하는 이순신의 결의를 바다의 이미지와 함께 시각적으로 전달합니다. 전시는 이순신의 승리와 시련, 성찰, 사후의 기억까지 연속적 서사로 엮어 총 4부로 구성했죠. 1부 ‘철저한 대비, 그리고 승리’는 임진왜란 이전 이순신의 철저한 대비를 조명하고, 한산도대첩으로 이어지는 조선 수군의 전술 체계를 소개합니다. 또한 한산도로 진을 옮기고 삼도수군통제사로서 진을 경영했던 지휘관 이순신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1591년 2월, 정읍현감(종6품) 이순신은 당시 좌의정이던 서애 류성룡이 추천하여 파격적으로 전라좌수사(정3품)에 임명됐죠. 이순신을 전라좌도 수군의 지휘권을 가진 관원인 전라좌수사로 임명하면서 제29호 밀부와 함께 내린 문서인 ‘사부유서’도 볼 수 있어요. 병란(兵亂)이 일어났을 때, 비상명령이 있을 때는 왕명과 같이 내려온 밀부와 자신의 밀부를 맞추어 확인한 후 때를 가리지 않고 급히 군사를 움직일 수 있죠. 이순신은 여수의 전라좌수영에 부임하자마자 병력과 전선을 점검하고, 무기와 각종 장비, 성곽과 봉수대를 정비했죠. 좌수영 앞바다에는 쇠사슬을 걸어 기습에 대비했고, 판옥선을 보수하고 거북선을 새로 만들었습니다. 군사들을 철저하게 훈련하고 백성에게 피해가 없도록 엄히 다스렸어요. 임진왜란 직전, 이순신은 거북선의 화포 시험까지 마치며 만약의 사태에 대한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초상화와 임진왜란의 전초기지로 사용된 일본 나고야성에 배치한 다이묘(大名) 진영을 그린 지도, 다양한 형태의 투구를 쓰고 있는 구로다 나가마사와 가신 24명의 초상화도 눈에 띄었죠. 동래읍성 전투는 임진왜란의 두 번째 전투인데요. 2005~2008년 진행된 동래읍성 해자 발굴에서 확인된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발굴된 임진왜란 희생 유골 사례도 볼 수 있어요. 조총의 탄환이 관통한 흔적이 있는 유아의 두개골 등 굉장히 잔혹했던 당시의 상황을 보여줍니다.
소중 학생기자단을 위해 전쟁 영웅을 넘어 인간 이순신의 내면과 감정, 그리고 시대가 만들어온 상징으로서의 이순신을 입체적으로 설명해준 유새롬 학예사.

이순신 장군이 전쟁을 대비하면서 가장 신경 썼던 건 배를 다시 만드는 거였죠. 당시 조선의 배였던 판옥선을 개량해서 거북선을 만들었습니다. 거북선이 처음 모습을 드러낸 전투는 1592년 5월 29일 사천해전이에요. 이순신은 거북선을 돌격선으로 삼고 대형총통(천자총통·지자총통·현자총통·황자총통)을 쏘아 일본 전선을 격파했죠. 이어 6월 4일 당항포해전에서도 거북선이 선두에서 돌진해 조선 수군의 승리를 이끌었습니다. 거북선은 갑판을 덮개로 덮고 그 위에 철촉을 박아 적이 오르지 못하게 했죠. 안에서는 밖을 볼 수 있으나 밖에서는 내부가 보이지 않았으며 사방에서 포를 쏠 수 있었어요. 거북선은 조선 수군을 보호하며 적선 사이를 자유롭게 드나들며 큰 타격을 주었죠. 일본군은 안이 보이지 않아 사방에서 화포를 쏘아도 제대로 타격할 수 없는 거북선을 두려워했어요.

조선 후기 수군의 체제와 훈련 형태를 알 수 있는 자료인 수군조련도병, 이순신을 전라도·경상도·충청도의 삼도 수군을 총괄하는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한 문서도 봤죠. 명나라와 일본의 강화 협상이 진행되던 1593년 7월, 이순신은 진지를 한산도로 옮겼습니다. 한산도는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이어지는 바닷길의 요충지로 일본군의 보급을 차단하고 조선 수군의 방어에 유리한 지점이었죠. 그리고 8월에 이순신은 초대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어 전라도·경상도·충청도 삼도의 수군 전체를 지휘하게 되었습니다. 전쟁 중 흉년과 전염병으로 많은 이들이 쓰러지자 이순신은 전력을 유지하면서도 백성들이 살길을 마련했어요. 병사들이 직접 농사짓는 둔전을 마련하고, 물고기와 소금을 팔아 군량을 확보했으며 전선을 건조했죠. 또 조정에 건의하여 진중에서 무과시험을 실시하여 군사들의 사기를 높였습니다. 이순신은 전투에 능한 용맹한 장수일 뿐만 아니라 군사와 백성의 삶을 섬세하게 살핀 따뜻한 인품의 지휘관이었습니다. 이를 덕장이라고 해요.

이순신과 조선 수군의 무기 운용 관련 자료도 볼 수 있었어요. 이순신과 조선 수군은 임진왜란 당시 해전에서 일본군의 조총과 백병전에 맞서 화포 중심의 전투 방식을 확립했죠. 이순신은 대형 화살인 대장군전·장군전을 천자·지자총통으로 발사해 나무로 만든 적선을 깨부수는 당파 전술을 사용했습니다. 거북선이 선두에서 적의 지휘선을 향해 돌진해 근접 사격을 가하면, 뒤이어 판옥선들이 각종 화포와 화살을 발사해 적을 무찌르고, 마지막에 화공으로 적선을 불태우며 전투를 끝냈죠.
이순신과 조선 수군의 무기 운용 관련 자료 및 대형총통(천자총통·지자총통·현자총통·황자총통) 모형도 전시됐다.

일본군의 조총은 육지에서는 위력적이었지만 바다에서 파도에 흔들리는 배 위에서는 효과적인 공격 수단이 아니었어요. 일본 수군의 배는 가볍고 바닥이 뾰족해 빠르지만 충격에 약했습니다. 반면 조선 수군은 대형 화포의 화력과 신속한 방향 전환이 가능한 판옥선, 적진을 종횡무진 누빌 수 있는 거북선을 바탕으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죠. 소중 학생기자단은 영상을 통해 대형 화포인 천·지·현·황의 총통으로 대형 화살을 쏘아 상대의 배를 깨부수는 당파 전술부터 탄환과 화살을 비와 우박처럼 퍼붓고, 마지막으로 화약무기로 집중 공격하는 분멸의 전술을 입체적으로 살펴봤어요.

유 학예사가 “전시품 설명을 자세히 보면 패널 제목을 이순신 장군의 시점으로 써놨어요. 부산 함락 같은 경우는 ‘분하고 원통하다’, 거북선을 만든 부분은 ‘돌격하라 거북선이여’ 이런 식으로 이순신의 기록에서 뽑거나 아니면 이순신이 했을 법한 말로 구성했으니 제목을 따라가면서 읽으면 이순신의 시점으로 전시를 볼 수 있을 거예요”라고 관람팁을 전했죠.
이순신 장검은 2m에 가까운 길이와 고급스러운 장식 문양으로 보아 위엄을 드러내는 의장용일 가능성이 높다.

2부 ‘시련과 좌절의 바다를 넘어’에서는 백의종군과 칠천량 패배를 거쳐 “신에게는 아직도 전선이 12척이 있습니다. 죽을힘을 다해 막아 싸운다면 오히려 할 수 있을 것입니다”(『이충무공행록』)라고 언급하며 출전했던 명량대첩의 기적, 그리고 노량해전으로 이어지는 절망과 재기의 서사를 다뤄요. 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이순신 장검과 『난중일기』를 드디어 만날 수 있습니다. 장검은 2m에 가까운 길이와 고급스러운 장식 문양으로 보아 실제 전투에서 사용했다기보다는 위엄을 드러내는 의장용일 가능성이 높아요. 긴 칼 한 쌍의 슴베(칼 손잡이와 칼날을 연결하는 부위)에는 모두 “갑오년(1594) 4월에 태귀련과 이무생이 만들었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제작 시기와 제작자를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칼날에도 각각 글귀가 새겨져 있는데, 『이충무공전서』에 수록된 검명과 내용이 같으며, 칼날의 명문은 이순신의 글씨라고 해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석 자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하가 두려워 떨고’, ‘한 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산하를 물들이도다’. 이 칼이 만들어진 1594년은 명나라와 일본의 강화 교섭이 진행되던 때로, 이순신은 정유재란 직전인 1597년 2월까지 삼도수군통제사로 한산도에서 군영을 다스렸죠. 당시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이어진 전쟁과 전염병, 기근으로 고통을 겪고 있었어요. 이순신 장검 두 자루의 칼날에 새겨진 글귀에는 이러한 시련의 시기에 마음을 다잡고 반드시 백성들과 나라를 지켜내겠다는 맹세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서준 학생기자가 "임진왜란 당시 활약한 이순신이 두 명이라고 하던데, 진짜인지" 궁금해했어요. “맞아요. 한글로 하면 이순신 동명이인인데 한자가 달라요. 이순신 장군의 휘하에 이순신이라는 또 다른 장수가 있었죠. 이순신이 굉장히 아끼는 부하 중의 한 명이고 『난중일기』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 학예사는『난중일기』 이야기를 이어나갔죠.
『난중일기』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부터 노량해전이 있었던 1598년까지, 7년간 이순신이 남긴 기록이다.

“우리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 이 말 많이 듣죠. 이순신의 명언이라고 하는데 바로 『난중일기』에 실렸습니다. 명량대첩 전날 두려움에 떨고 있는 장수들을 독려하면서 한 말이고요. 이순신이 전쟁 중에 직접 쓴 친필 『난중일기』 7권이 모두 전시된 건 처음이에요.” 『난중일기』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부터 노량해전이 있었던 1598년까지, 이순신이 남긴 7년의 기록을 말하죠. 7년 동안 거의 매일 성실하게 쓴 일기엔 전투와 군영 경영과 같은 공적인 내용도 있지만, 소소한 일상의 기록부터 선물 목록, 장계나 편지의 초안, 수결을 연습한 흔적도 남아 있죠. 또 전장을 이끄는 지휘관으로서의 책임감과 고뇌, 어머니에 대한 효심과 가족에 대한 애틋함, 나라에 대한 걱정, 주변 인물에 대한 평가와 감정이 솔직하게 기록돼 인간 이순신의 성품과 마음을 엿볼 수 있어요.

“흰머리를 뽑았다는 되게 소소한 얘기도 있는데, 그 이유가 어머니가 자신의 아들이 늙은 것을 걱정하실까 봐 흰머리를 뽑았다는 얘기도 있고요. 가족과 아들을 엄청 사랑했는데, 전쟁 중에 아들들이 군영에 왔다가 집에 가면 다 장성한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도착할 때까지 무사히 갈까 걱정이 된다 이런 글을 굉장히 많이 쓰셨어요. 이순신 하면 강인하고 흔들리지 않는 의지를 가진 분이라고 생각하는데 고민하는 인간적인 면모도 많고, 아들을 생각하는 평범한 아버지였다는 것도 알 수 있고요. 굉장히 섬세한 감성의 소유자라는 생각이 드는 게 무인답지 않게 굉장히 시적인 표현들도 많아요. 특히 인상적인 일기를 꼽자면 명량해전이 일어난 한 달 후에 막내아들이 일본군에게 죽게 되는데, 그날의 일기가 정말 가슴 절절하죠.”

이번 전시에는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의 다이묘가 보관해온 유물, 다치바나 무네시게 가문의 투구와 창, 금박장식투구, 나베시마 나오시게 가문이 소장해온 금채 ‘울산왜성전투도’ 병풍 등도 공개됐어요. 이는 임진왜란이라는 동일한 사건을 서로 다른 시각에서 바라본 귀중한 자료죠. 정유재란 때 조선의 구원군으로 온 명군이 조선 남해안의 일본군을 물리친 공을 기념하는 내용의 병풍 그림 ‘정왜기공도병’은 스웨덴 발렌베리가문이 소장하다가, 전반부는 스웨덴 동아시아박물관, 후반부는 국립중앙박물관이 각각 보관해왔는데요. 이번 전시에서는 두 나라에 나뉘어 있던 병풍이 처음으로 한 공간에서 다시 만나는 역사적 순간이 구현됐죠.
노량해전이 벌어졌던 전남 백도 근처에서 출수된 지자총통 파편. 전시를 준비하며 하나의 총통인 걸 알게 됐다.

“전시 준비 과정에서 새롭게 밝혀진 사실이나 자료가 있나요”라는 정하은 학생기자의 질문에 유 학예사가 “지자총통은 두 번째로 큰 대형 화포인데요. 아마 발사 당시에 파열돼 바다에 잠겨 있다가 건져냈는데 이게 두 개가 한 짝이었던 거를 몰랐었어요. 근데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여기 단면이나 이런 것들이 일치함을 알아내서 몇백 년 만에 다시 한 개체를 찾아서 전시하게 됐어요”라고 얘기했습니다. 전시장엔 노량해전이 이루어졌던 전라남도 백도 근처에서 출수된 지자총통의 파편과 함께 사천왜성에서 출토된 총통과 탄환도 전시됐어요.

3부 ‘바다의 끝에서 나를 돌아본다’에서는 노량해전에서 생을 마감한 이순신의 시선으로 그의 삶을 돌아봅니다. 출생부터 임진왜란 이전까지의 삶을 반추하며 전쟁 영웅 이전에 한 인간의 내면을 엿보죠. 이순신의 전기들을 보던 소중 학생기자단이 류성룡의 임진왜란 회고록 『징비록』에 주목했어요. 임진왜란 때 영의정과 도체찰사를 말아 내정과 군무를 총괄했던 류성룡은 전쟁이 끝난 후 임진왜란의 전말과 당시 자신의 경험을 정리해 1604년(선조37) 『징비록』을 집필하죠. ‘징비’는 중국 고전 『시경』의 “지난 일을 징계하여 후환을 삼가다”라는 구절에서 딴 것입니다. 이 책에서 류성룡은 임진왜란을 끝낸 공로는 이순신과 조선 수군에게 있음을 분명히 하고, 이순신을 천거한 본인의 역할도 강조했죠. 『징비록』은 17세기에 일본으로 전해져 일본 내에서도 간행돼 널리 읽혔고, 이어 청대 중국에도 알려져 동북아 삼국의 베스트셀러가 되었죠. “여기 이순신 장군의 죽음을 기록한 부분을 보면 당시에도 백성들이 이순신 장군이 나라를 구했던 것을 알고 영웅으로 여겨 죽음을 굉장히 슬퍼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4부 ‘시대가 부른 이름’에서는 이순신 사후 조선 후기부터 근대, 현대에 걸쳐 이순신이 어떻게 기억되고 있는지 시대가 필요로 한 이순신의 모습을 추적합니다. 전쟁이 끝난 뒤 조선 조정은 이순신을 선무일등공신에 책봉했어요. 이순신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그의 전적지와 연고지 곳곳에 사당과 기념비가 세워졌어요. 여수의 충민사를 시작으로 여러 지역 백성들이 청원하여 사당을 세웠고, 부하 장수들은 여수에 타루비(눈물을 흘리며 세운 비)를 세워 그를 기렸죠. 인조는 시호 ‘충무’를 내렸고, 숙종은 아산 현충사에 현판을 내려(사액) 국가 차원에서 추모했습니다. 영조는 아산의 이순신 종가를 중심으로 사적을 정비하고 그의 후손을 예우했어요.
이순신이 외가쪽 친척인 현건 등에게 보낸 편지를 모은 『서간첩』. 이순신의 친필을 살펴볼 수 있다.

정조는 본격적으로 이순신을 나라의 영웅으로 받들었습니다. 이순신을 영의정에 추증하고 친히 충무공 이순신의 신도비명을 지었으며, 『이충무공전서』를 간행해 그의 생애와 업적을 왕조가 공인한 기록으로 남겼죠. 이순신은 조선 왕조가 대를 이어 기린 충신의 표상으로 자리 잡게 된 겁니다. 이순신을 공신에 책봉한 문서, 이순신 집안에 노비를 내려주는 문서, 이순신의 공을 기리기 위해 전라좌수영이 있던 전남 여수에 건립한 ‘통제이공수군대첩비’의 탁본도 만나볼 수 있죠. 1931년 충무공 묘소 운영에 필요한 토지가 경매 위기에 놓이자 국내외 동포 2만여 명이 성금을 모았는데요. 덕분에 이듬해 ‘이충무공유적보존회’에서 현충사를 중건했죠. 이는 일제강점기 최초의 전국적 문화유산 보존운동으로 기록되었습니다.

광복 이후 이순신은 분단과 전쟁의 시대 속에서도 남북한이 함께 기리는 위인으로 자리 잡았죠. 그의 이름은 화폐와 우표, 훈장에 새겨졌고, 연구와 기념사업은 물론 영화·연극·소설 등 대중문화 매체에서 시대를 넘어 살아 있는 우리들의 표상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해외에서도 이순신은 19세기 말부터 꾸준히 세계 해전사에서 대단한 전술을 사용한 지휘관으로 소개되고 있는데요. 1899년에는 미국 선교사 호머 헐버트가 거북선을 세계 최초의 철갑선으로 소개하며 이순신의 이름이 미국과 호주에 알려졌죠. 이와 관련된 물품들도 다양하게 전시됐어요. “세계 해전사에서 거북선의 존재, 학익진 등의 진법같이 해류 등 자연 지형·지물을 잘 활용했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받는다고 생각해요.”
1932년 현충사를 중건하면서 만들어진 초상화는 무인의 느낌을 풍기는 강인한 모습을 하고 있다.

시대별 이순신에 대한 이미지가 어떤지 볼 수 있는 초상화도 있습니다. 1932년 현충사를 중건하면서 만들어진 초상화는 흔히 알고 있는 이순신의 이미지랑 좀 달랐죠. 무인의 느낌을 풍기는 강인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요. 1940년대까지 이러한 이미지로 통용되다가 1962년 정읍군의 요청으로 장우성 화백이 현재 표준 영정으로 알려진 초상화를 제작했어요. 『징비록』의 ‘선비 같은 용모’ 등의 기록을 바탕으로 하고, 이순신 종손의 모습을 참고해 영정을 그려 아산 현충사에 봉안했죠.

전시는 에필로그 영상으로 끝나는데요. 이순신의 죽음을 애도하고 그의 삶을 기억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출발해 조선에서 현대, 그리고 세계로 확장되는 이순신의 기억을 담아냈죠. “이 영상에 전시에서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이 좀 잘 담겨 있어요. 이순신이 썼던 『임진장초』라는 보고서를 보면 다른 사람들의 전투 보고서랑 다른 점이 있어요. 다들 전투에서 세운 공로를 기록하는데, 공을 세운 사람들의 이름을 다 적어요. 장수부터 노 젓는 사람, 노비의 이름도 다 적고 부상자·사망자까지 다 적습니다. 결국은 자신의 공만으로 된 것이 아니고 함께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공을 이야기한다고 얘기하고 있고요. 이순신 사후에 여러 가지 이순신에 대한 평가나 기록들, 현재 이 전시를 준비하면서 받은 시민 인터뷰나 기획자들의 이순신에 대한 생각들을 다 정리한 영상이니 길더라도 꼭 보길 바랍니다.”
이순신이 1592년 4월부터 1594년 1월까지 임금에게 올린 장계 61편을 후대에 베껴 써서 엮은 『임진장초』.

하은 학생기자가 “이순신이 많은 사람에게 존경받는 이유는 전쟁에서의 극적인 승리 말고도 뭐가 있나요”라고 질문했어요. “방금 말한 『임진장초』를 보면 굉장히 사람들을 잘 챙기는 면모도 있죠. 전투에만 능한 장수가 아니라 백성과 군사를 살리기 위해 한산도에서 진을 경영하면서 둔전을 경영한다든가 또 물고기를 잡아서 그걸 팔아 백성들이 먹고살 수 있는 길을 마련하는 등 사람들을 위한 그런 것들을 굉장히 많이 잘하셨던 분이라는 점에서 좀 존경받을 수 있지 않나 생각이 듭니다.”

원교 학생기자는 "전시를 통해 미래 세대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지" 궁금해했어요. “영웅 하면 나랑은 다른 사람, 그 사람은 잘났으니까 원래 잘했겠지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이순신도 우리랑 다르지 않은 인간이었다는 점이에요. 처음부터 잘하지도 않았고 좌절과 시련을 겪었고 끊임없이 고민하며 불안해하기도 했던 한 인간이거든요. 이순신과 같은 마음이 나한테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고, 늘 부하 장군들과 소통하고 아랫사람들은 물론 백성들과도 함께하려고 했던 그 마음이 의미 있다고 생각 들죠. 그러니까 특별한 사람만 영웅이 아니라 나 자신도 이미 한 사람의 영웅이고 나도 할 수 있다, 또 영웅은 혼자 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주변 사람들과 잘 소통하면서 해야 한다는 거 이 두 가지를 이야기해 주고 싶습니다.”

1598년 11월 19일(양력 12월 16일)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은 적의 총탄에 맞아 전사했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몸은 떠나갔지만 이순신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죠. 그에 대한 우리의 기억이 계속되며 지나온 세월보다 더 많은 이야기가 계속될 것입니다. 우리들의 이순신 이야기는 앞으로도 계속 우리 후손들에게 이어질 테니까요.
이순신을 다시 알아보는 시간을 가진 홍원교·정하은·이서준(왼쪽부터) 학생기자가 거북선 모형 앞에 섰다.

이순신과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기록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반드시 살고자 하면 죽는다
-『난중일기』1597년 9월 15일(명량대첩 전날)

간담이 타고 찢어지고 또 타고 찢어졌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하늘이 정한 이치가 아니냐. 그런데도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이치가 어찌 이렇게 어긋날 수 있느냐. 하늘과 땅이 캄캄하고 한낮의 해도 빛이 바랬다. 불쌍한 내 어린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내가 지은 죄 때문에 받아야 할 하늘의 재앙이 네 몸에 미친 것이냐? 목 놓아 서럽게 울부짖을 뿐이다. 하룻밤이 1년 같다. 하룻밤이 1년 같다.
-『난중일기』1597년 10월 14일

지금 신에게는 전선이 아직도 12척이 있습니다.
죽을 힘을 다해 막고 싸운다면 오히려 해낼 수 있습니다.
- 이분,『이충무공행록』

자려 해도 잠들 수 없었다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한시도 떠나지 않았다
-『난중일기』1593년 7월 1일

어머님을 모시고 같이 한 살을 더했다
이는 전쟁 중이라도 행복한 일이구나
-『난중일기』1594년 1월 1일

비가 아주 많이 쏟아졌다. 모든 일행이 다 꽃비에 젖었다.
-『난중일기』1592년 2월 23일

아침에 흰 머리카락 십여 가닥을 뽑았다.
하얗게 머리가 세는 것을 어찌 꺼릴까.
다만 위로 늙으신 어머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난중일기』1593년 6월 12일

달빛은 낮과 같이 밝았다.
출렁이는 물빛은 하얀 비단 같았다.
-『난중일기』1593년 8월 17일

어머님께서 평안하시다고 했다. 그러나 아들 면은 많이 아프다고 했다.
가슴이 지독히 탔다. 가슴이 지독히 탔다.
-『난중일기』1594년 6월 17일

아침부터 흐렸다. 늦게 큰비가 내렸다. 농민의 바람을 가득 채워주었다.
기쁘고 행복한 것이 말할 수 없구나. 비가 오기 전에 훈련용 화살
5~6순을 쏘았다. 비가 밤새 그치지 않았다
-『난중일기』1596년 5월 6일

맑았다. 옥문을 나섰다. 남대문 밖 윤사행의 사내종의 집에 도착했더니 봉과 분,
울과 사행, 원경이 한자리에 같이 앉아 있어 오랫동안 이야기했다. 지사 윤자신이
와서 위로했다. 비변사 낭청 이순지가 와서 만났다. 한숨이 더욱더 깊어지는 것을
이길 수 없었다. 윤자신은 돌아갔는데, 저녁을 먹은 뒤에 술을 가지고 다시 왔다.
윤기헌도 왔다. 마음으로 권하며 위로했기에 사양할 수 없었다. 마지못해 술을 마셔
아주 많이 취했다....술에 취했다. 땀이 나 몸이 젖었다.
-『난중일기』1597년 4월 1일

이순신은 천하를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이 있고
찢어진 하늘을 꿰매고
흐린 태양을 목욕시킨 공로가 있는 분입니다
- 명나라 장수 진린

이순신은 진실로 장수의 재질을 지녔으며,
재능은 수륙을 겸비하여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쉽게 얻지 못하거니와
변방의 백성들이 우러러보고 적들이 두렵게 여깁니다.
- 정탁,『신구이순신차초』

이순신은 충신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십여 명만 있다면 왜적에 대해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 명나라 부총 이방춘,『선조실록』

지금 싸움이 급하구나, 부디 내가 죽었다고 말하지 마라
- 이분,『이충무공행록』

이순신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리자 우리 군사와 명나라 군사들이
모두 통곡하였으니, 마치 자기 부모의 죽음을 애통해하는 것 같았다.
이순신의 주검을 넣은 관이 지나는 곳곳의 백성들은 제사를
지내는 제단을 차렸고, 상여를 막으면서
“참으로 공께서 우리를 살렸는데 지금 우리를 버리고
어디로 가십니까!”라며 통곡하니, 길이 막혀서 상여가
나아가지 못하였다. 길가는 사람들도 모두 통곡하였다.
-류성룡,『징비록』

임금의 수레가 한성으로 돌아오고
백성들이 사는 자리에서 편안하여
우리나라 억만년 대계를 회복했으니
이 역시 충무공의 공이 아니겠는가
- 정조,『어제 이순신신도비』



한은정([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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