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 일본 총리가 새 역사를 썼다.
8일 진행된 일본 중의원(하원) 선거에서 일본 정치사상 처음으로 자민당 단독 316석을 차지하며 헌법 개정안 발의가 가능한 3분의 2 의석을 넘어서는 대승을 거머쥐었다 36석을 획득한 일본유신회까지 합치면, 총 465석의 중의원에서 연립여당이 352석에 달하는 ‘매머드급 여당’이 탄생하게 된 셈이다.
예측을 뛰어넘는 결과에 일본 언론과 전문가들은 몇 가지 요인을 꼽고 있다.
가장 큰 요인은 역시 다카이치 ‘열풍’이다. 여성·비세습·무파벌 등 일본 정계의 문법을 깨는 새로움을 갖춘 데다 소탈한 화법 등으로 국민들에게 다가가면서 무당층 표가 대거 자민당으로 쏠렸다. 너무 많은 표를 받은 탓에 비례투표에서 자민당 후보가 부족해 14석을 다른 당에 양보해야 하는 웃지 못할 상황까지 벌어졌다. 반면 다카이치 정권을 견제하겠다며 제1야당인 입헌민주당과 공명당이 합세해 만든 중도개혁연합은 167석에서 49석으로 의석수가 3분의 1토막이 났다.
여권의 약점인 민생 문제에서도 ‘책임 있는 적극 재정’을 내걸어 야권과의 쟁점을 사실상 지웠다. 이원덕 국민대 교수는 "다카이치 총리가 야권이 주장하던 '소비세(식료품) 제로'를 공약으로 내세우자 정책 쟁점이 사라지고, 다카이치가 선거의 메인 이슈가 됐다"고 짚었다. 중도개혁연합에선 2011~2012년 민주당 정부 때 총선 대패로 정권을 자민당에 넘겨준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전 총리가 간판으로 나섰다. 이 교수는 "신선한 다카이치와 낡은 노다 중 선택하는 구도가 됐다"고 분석했다.
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시진핑 중국 주석 등 '스트롱맨'이 이끄는 국제정세 속에서 시대가 다카이치 총리가 내건 '강한 일본'도 여론의 호응을 얻었다. 기존의 국제 질서가 흔들리고 중국의 위협이 고조되면서 ‘개헌을 통한 자위대 법적 근거 마련’, ‘스파이 방지법 제정', '외국인 규제 강화’, ‘3대 안보 문서 개정 및 군사력 강화’ 등에 대한 공감대가 보수 우파를 중심으로 확산했다는 것이다. 중·일 갈등을 불러온 '대만 유사시 개입' 발언 역시 반중 정서가 강해지는 상황 속에서 선거에 긍정적으로 작용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선거 시기도 야당의 허를 찔렀다. 예상보다 이른 1월 전격적인 중의원 해산과 16일짜리 '초단기 승부'로 야당은 '기습'을 당한 셈이 됐다. 입헌민주당과 공명당이 허겁지겁 중도개혁연합을 만들었지만, 선거가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화학적 결합에 실패한 야권은 제대로 힘도 쓰지 못한 채 대패했다. 고이케 유리코(小池百合子) 도쿄도지사도 9일 "오다 노부나가가 이마가와 요시모토를 (기습으로) 쳤던 오케하자마(桶狭間) 전투 같았다"고 이번 선거를 평했다.
전례 없는 ‘황금기’를 맞이하게 된 다카이치 총리는 당장 헌법 개정에 의욕을 보이며, 미·일 동맹 강화를 강조하는 등 ‘다카이치 색깔’ 드러내기에 나섰다.
9일 교도통신 등 현지 언론에 따르면 다카이치 총리는 전날 일본 민영방송에 출연해 “헌법 개정안은 각 당이 준비하고 있다”면서 “구체적 안을 헌법심사회에서 심의하게 된다면 감사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전쟁과 무력행사를 영구히 포기하고 전력 보유와 교전권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헌법 제9조의 ‘평화조항’을 개정해 자위대를 헌법에 명기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압승을 거둔 자민당 내에서는 ‘다카이치 중심’으로 권력구도가 재편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2024년 선거에서 낙선했던 한 자민당 의원은 전날 압승 소식이 전해지자 아사히신문에 “선거에서 이기게 해준 사람을 따라가는 것이 자민당”이라고 말했다. 총선 승리를 이끈 다카이치 총리에게 반기를 들기 어렵다는 얘기다.
공동 집권당인 일본유신회에서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연립에 의지하지 않고도 다카이치 정권이 자민당 단독으로 정책 추진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다카이치 총리는 지난해 10월 당시 연립정권 합의문에서 일본유신회 정책인 중의원 수 삭감과 도쿄에 이은 제2 수도를 만드는 부(副)수도 구상 등을 합의문에 넣은 바 있다. 한 일본유신회 의원은 이 매체에 “이 정도로 크게 이겼으니 자민당도 강경하게 나올 것”이라며 “협상이 어려워질 것”으로 전망했다.
한편 다카이치 총리가 이날 내놓은 첫 대외 메시지는 ‘미·일 동맹’이었다. 형식상으론 총선 전 자신을 이례적으로 공개 지지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 대한 화답이자, 총선 압승 축하에 대한 감사지만 이번 선거로 자신감을 얻은 다카이치 총리의 미·일 동맹 강화 포석으로 풀이된다.
다카이치 총리는 이날 X(옛 트위터)에 트럼프 대통령의 축하 인사를 공유하며 영문과 일문으로 글을 올렸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따뜻한 말씀에 진심으로 감사한다”며 “올봄 백악관을 방문해 일·미 동맹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더 많은 것을 진행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또, “일·미 동맹과 일·미 우호관계는 신뢰와 긴밀하고 견고한 협력 위에 구축됐다”면서 “우리 동맹의 잠재력은 무한대”라고 강조했다.
다카이치 총리의 이런 메시지 뒤엔 트럼프 정권과의 관세협상이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트럼프 대통령이 다카이치 정권 지지를 밝힌 전날, 일본 측엔 ‘트럼프 대통령이 격분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달됐다고 전했다.
일본 정부가 약속한 5500억 달러(약 805조원)의 대미투자 지연이 배경으로 트럼프 대통령은 ‘일본이 의도적으로 협상을 지연시키고 있다’며 불만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오는 4월 트럼프 대통령의 방중을 앞두고 미·일 정상회담에 나서는 다카이치 총리가 ‘트럼프의 지지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