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강전 상대가 이번 대회 랭킹 1위 선수더라고요. 하필이면 저 무서운 선수를 만나나 싶어 눈뜨고 볼 수가 없었죠. TV 음소거 해놓고 거실에서 108배 하며 반야심경을 외웠어요. 끝날 때쯤 소리를 키웠더니. 세상에, 남편이 이겼대요!”
남편이 알프스의 설원을 날아 은메달을 따던 순간, 경기도 용인 자택의 거실은 ‘절’로 변해 있었다. 8일(한국시간)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 스노보드 평행대회전에서 한국 올림픽 통산 400호 메달을 거머쥔 김상겸(37). 그의 뒤에는 남편만큼 사투를 벌인 아내 박한솔(31) 씨가 있었다.
이들 부부의 이야기는 신파보다는 발랄한 로맨틱 코미디에 가깝다. 치과위생사인 아내 박 씨는 “오빠 경기 응원할 때 혼자 있어 보기, 다 같이 모여 응원하기, 사람 안 만나기, 잠깐 산책하기 등 별의별 짓을 다 해봤다”며 이번엔 전략적으로 ‘나 홀로 응원’을 택했다. 베이징 올림픽 때는 친정 부모님 눈치 보느라 속상한 티도 못 냈기 때문이다. 박 씨는 불교 신자도 아니면서 시합 한 달 전부터 스노보더 출신 주지 스님이 있는 남양주 봉선사를 찾아 기도를 올리고, 경기 당일에도 ‘108배와 반야심경’이라는 필살기까지 쓴 끝에 기적을 맛봤다.
김상겸은 2011년 동계 유니버시아드 우승으로 이름을 처음 알렸다. 그는 2014년 소치 올림픽에 한국 선수 최초로 평행대회전과 평행회전 종목에 출전, 올림픽 스노보드 알파인 종목에 한국의 이름을 처음으로 남겼다. 2017년 삿포로 아시안게임 회전 종목 동메달을 획득한 그는 고향에서 열린 2018년 평창 올림픽에도 참가했다. 이후 2022년 베이징을 거쳐 이번 대회까지 올림픽 개근 도장을 찍었으나, 세계의 벽은 늘 높았다.
사실 김상겸의 올림픽 ‘4수’는 눈물겨운 고행이었다. 연애 전에는 부족한 훈련비를 벌기 위해 주말마다 건설 현장에서 이른바 ‘노가다’를 뛰며 보드를 타기도 했다. 박 씨는 “2022년 베이징 올림픽 후 위로해주려 영상 통화를 했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서로 울고 있더라. 그때 결혼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내가 이 사람이 슬퍼할 때 같이 위로하고 공감해줄 수 있는 관계구나라고 생각했다”고 추억했다.
남편 김상겸 역시 아내의 간절함을 잘 안다. 결승전을 앞두고 자꾸 터져 나오려는 눈물을 참으려 슬로프 위에서 일부러 고함을 지르며 감정을 추스렀다는 그는 메달을 확정 지은 뒤에야 마음껏 울었다. “오늘 경기 내내 운이 따랐지만, 내 생애 최고의 행운은 아내와의 결혼”이라며 알프스 산꼭대기에서 사랑 고백을 던졌다.
올림픽에만 서너 번, 많게는 그 이상 출전한 선수는 즐비하다. 그러나 김상겸처럼 단 한 차례도 메달을 따지 못하다가 네 번째 올림픽에서 결실을 본 경우는 흔치 않다. 여러 번 넘어졌지만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도전한다는 올림픽 정신을 김상겸이 다시금 일깨웠다.
김상겸의 눈물샘을 자극한 또 하나의 단어는 부모님이다. 부모님은 아들이 선천적으로 천식을 앓자 처음에는 육상을 권유했고, 중학교 때부터는 스노보드를 마음껏 탈 수 있도록 지원했다. 김상겸은 “부모님 단어만 나와도 눈물이 나온다”며 잠시 숨을 고르고는 “사실 부모님께서 내 건강을 걱정하셨다. 그럴 때마다 ‘그럴 거면 왜 운동을 시키셨느냐, 계속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아들이 그동안 제대로 효도도 하지 못했는데 이 메달을 들고 가 꼭 안겨드리겠다”고 했다. 30대 후반인 김상겸은 “올림픽에 두 번 정도 더 나가고 싶다”며 의지를 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