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BM4(4세대 고대역폭 메모리)는 메모리와 로직 공정(연산 회로 제조)이 본격적으로 결합하는 기술적 분기점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상이한 개발 전략을 선택했다.
SK하이닉스는 TSMC와 협업을 유지하고 있다. TSMC 고객사들과 유기적 호환성을 극대화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반면 파운드리의 생산 일정과 우선순위에 따라 출시 시점과 가격 결정권이 제약될 수 있다.
삼성전자는 파운드리와 메모리를 모두 보유한 강점을 활용해 HBM4 하단 제어 칩까지 자체 생산한다. 고객 맞춤형 대응 속도와 기술 보호 측면에서 유리하다. 다만 최근 몇 년간 드러났듯 파운드리 부문 유지에 따른 기회비용이 만만치 않다.
두 기업이 모두 성공해 우리나라가 글로벌 메모리 산업 주도권을 유지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반도체 패권은 이미 개별 기업 경쟁을 넘어 국가 단위 생태계 역량을 겨루는 시스템 전쟁으로 진화했다. 미국과 중국이 막대한 자원과 정치력을 동원해 자국 중심 인프라와 생태계를 구축하는 상황에서, 한국도 국가 플랫폼의 효율화를 서둘러야 한다. 제조 전후방 생태계, 전력·용수 인프라, 인력 양성, R&D 체계가 여기에 포함된다.
글로벌 시장에서는 치열하게 경쟁하되, 국내 생태계 차원에서는 협업이 필요하다. 첫째, 차세대 제조 기술의 표준화다. 한국의 소부장(소재·부품·장비) 생태계는 대기업별로 시장이 분절돼 규모의 경제 확보에 어려움을 겪어왔다. 그 결과 소자 기업의 설비투자 부담은 커지고, 단가 압박 속에 소부장 기업의 경쟁력은 약화됐다.
공정 기술 표준화는 단기적으로 기술 독점력을 일부 포기하는 선택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1980년대 일본 기업의 공세 속에서 미국 반도체 산업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배경 중 하나는 세마테크(SEMATECH)를 통한 공정 공동 개발과 표준화였다. 이는 소부장 경쟁력을 강화하고, 궁극적으로 소자 기업의 경쟁력을 끌어올렸다.
둘째, 국가반도체연구소 설립이다. 한국에는 기업들이 중장기·고위험 원천 기술을 공동으로 연구할 수 있는 중립적 공간이 없다. 산·학·연·관이 참여하는 연구소를 통해 초격차 기술 개발과 상용화를 위한 테스트베드를 구축해야 한다. 이는 제한된 연구개발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하고, 로드맵 없이 방만하게 운영돼 온 R&D 과제를 정리할 관리 주체를 확보하는 길이기도 하다.
반도체 산업은 컨소시엄 기반 협력을 통해 인류 역사상 유례 없는 기술 진보를 이뤄왔다. 진정한 경쟁력은 협력의 토대 위에서 만들어진다. 개별 기업 경쟁을 넘어 국가적 협력의 장을 마련할 때, 초격차로 가는 길이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