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비나무를 찾아 나섰다. 모든 나무를 아끼고 사랑하지만, 근래 들어 급격한 기후변화로 서식지가 사라져가는 고산지대에 자라는 가문비나무가 못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내가 사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가문비나무가 자라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나서, 어쩌면 다시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절박한 마음으로 길을 나섰다.
가문비나무 숲은 내 고향 영월에서 그리 멀지 않은 횡성의 주천 강가에 있었다. 햇살이 눈 부신 날, 차를 몰아 도착한 그곳은 해발 400m가 넘는 강가 둑방. 가문비나무들은 큰 키를 뽐내며 당당히 서 있었고, 한겨울이지만 상록 침엽수 특유의 푸른 기운으로 생동감을 내뿜고 있었다.
척박한 땅 견딘 가문비나무가
현악기 공명판으로 귀히 쓰여
삶의 시련을 회피하지 말아야
본래 가문비나무는 40m가 넘게 자라는 거목이다. 아름드리나무 밑에 서서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니, 가문비나무는 아래쪽 곁가지들을 스스로 떨군 채 오직 하늘을 향해 곧게 줄기를 뻗어 올리고 있었다. 이렇게 자란 가문비나무는 옹이가 없고 세포벽이 단단하여 유럽에서는 예로부터 바이올린·비올라·첼로 같은 현악기의 공명판을 만드는 귀한 재료로 쓰였다.
독일의 유명한 악기 제작 장인 마틴 슐레스케는 저서 『가문비나무의 노래』에서 가문비나무가 최고의 소리를 내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수목 한계선 아래의 척박한 환경은 가문비나무에게는 생존의 고난이지만, 울림에는 축복입니다. 메마른 땅이라는 위기를 견디며 나무가 아주 단단해지니까요. 바로 이런 목재가 ‘울림의 소명’을 받습니다.”
저지대의 온화한 기후 속에서 속성으로 자란 나무는 세포벽이 단단하지 않아 이런 나무로 바이올린 같은 악기를 만들면 매혹적인 소리를 내지 못한다. 깊은 울림의 진수는 척박한 땅에서 모진 시련을 견뎌낸 나무에게만 허락된다는 뜻이다.
이 바이올린 장인의 통찰에서 나는 삶의 지혜를 얻는다. 고단한 삶이 반드시 불행은 아니며, 안락하고 쉬운 삶이 꼭 축복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기름진 땅, 온화한 기후에서는 나무들이 쑥쑥 잘 자란다. 우리가 복으로 여기는 물질적 풍요로움도 종종 그렇다.
좋은 땅에서 빨리 자란 나무들은 자유롭게 공명하는 악기의 재료가 되지 못하듯이 우리 사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교만한 마음, 부유한 마음은 영(靈)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 그 마음속에 하느님이 깃들 여백이 없으니까 말이다.
강가 바위에 퍼질러 앉아 가문비나무 숲을 바라보았다. 푸른 바늘잎들은 쏟아지는 햇살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광합성에 열중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뭇잎이라는 작은 공장은 보이지 않는 대기 중의 탄소를 빛의 에너지와 결합해 눈에 보이는 생명의 물질로 바꾼다. 무(無)에서 유(有)로, 빛에서 생명의 몸으로 바뀌는 거룩한 변모다.
마틴 슐레스케는 이를 두고 이렇게 덧붙였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빛을 비출 때 우리 안에서도 ‘정신의 광합성’이 일어납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빛이 우리 안에서 구체적인 삶으로 변화하는 거룩한 과정입니다.”
이런 거룩한 과정을 이끄는 주체는 누구일까. 하느님일까, 하느님의 빛일까. 아니다. 하느님이나 하느님의 빛은 강압적이지 않다. 그분은 우리 인간의 의지를 존중하신다.
우리가 그 사랑의 빛을 받아들이려는 적극적인 수용의 의지가 있을 때, 즉 영적인 목마름이 있을 때 비로소 우리 존재는 그분의 거룩한 몸으로 빚어지는 것이다.
‘찾고, 구하고, 문을 두드리는 자에게 임하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우리의 영적 감수성이 깨어 있을 때만 그 빛은 우리 안에서 생명으로 화한다.
그곳을 떠나기 전, 다시 한번 가문비나무 숲을 돌아보았다. 나무는 우듬지에만 겨우 푸른 생가지를 달고서도 필사적으로 하늘을 갈구하고 있었다. 그것은 생존을 넘어선,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내기 위한 고귀한 인내의 몸부림처럼 보였다.
척박한 고난을 견뎌내며 영혼의 공명판을 다듬어가는 가문비나무처럼, 우리 또한 삶의 시련 속에서 복음의 소명을 발견해내야 하지 않을까. 세상의 소음이 아닌 하느님의 음성을 울려 퍼뜨리는 악기가 되기 위해, 오늘도 내 영혼의 창을 열고 영원한 생명의 빛을 향해 가지를 뻗어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