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 개막식이 열린 밀라노 산시로 스타디움 바로 옆에는 경마장이 있다. 산시로 경기장은 AC밀란과 인테르밀란의 홈구장으로서 밀라노 시민들의 가장 큰 자부심이자 상징이다. 여름철 이탈리아에서 가장 큰 야외 공연장으로 변모하고, 경마장도 밀라노 시민들의 소중한 도심 속 여가 공간이다.
프랑스 파리의 롱샴 경마장은 세계에서 가장 활발하게 운영되는 현대적인 경마장이다. 파리 시내 서쪽 불로뉴 숲에 위치한 이곳은 개선문에서 차로 15분 정도면 갈 수 있다. 런던 인근의 앱섬다운스에서는 매년 6월 초 앱섬 더비가 열린다. 고인이 된 엘리자베스 여왕이 즐겨 찾았던 경마대회다. 경기가 열리는 날엔 10만 가까운 시민들이 경기장 인근에서 피크닉을 하면서 영국 왕실과 더불어 경마를 즐긴다.
아시아의 대도시도 마찬가지다. 홍콩의 도심 한복판에 있는 해피밸리경마장은 고층빌딩에 둘러싸인 풍광이 이색적이다. 수요일 밤 야간 경마가 유명하고, 경마장 중앙의 비어가든에서는 라이브 음악을 들으며 맥주를 마실 수 있다. 도쿄에도 시내와 인근 교외 도시에 두 곳의 경마장이 있다. 도심에 위치한 오이 경마장은 직장인들에게 인기가 높고, 후추경마장은 시민들의 나들이 장소로도 제격이다.
이처럼 세계적인 도시들이 도심 한복판에 거대한 경기장과 경마장을 유지하는 것은 그것이 도시의 역사를 담은 '그윽한 문화 시설'이기 때문이다. 미국 메이저리그 시카고 컵스의 리글리 필드와 보스턴 레드삭스의 펜웨이 파크는 도심화가 진행되며 땅값이 천정부지로 솟았음에도 100년 넘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프리미어리그 등 영국 축구팀들의 홈구장 역시 도시 재개발의 물결 속에서도 지역 공동체의 심장으로 보존된다. 스포츠 시설은 단순한 부동산 부지가 아니라, 시민들의 희로애락이 서린 저장소인 까닭이다.
정부는 지난달 29일 부동산 대책을 발표했다. '도심 주택 공급 확대 및 신속화 방안'이라는 제목의 정부 대책 중에는 경기도 과천의 방첩사 부지 28만㎡와 경마공원 부지 115만㎡를 통합 개발해 총 9800가구를 공급하는 안이 있다. 올해 상반기 세부 계획을 세우고 2030년 착공한다는 방침이다.
공론화 과정은 거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지역 주민과 마주협회, 마필관리사 노조 등 경마 관계단체의 반발이 거세다.
이익 집단인 노조나 지역 주민의 이기주의를 옹호하려는 건 아니다. 부동산 안정은 매우 중요한 정책이지만, 경마장을 허물고 아파트를 짓겠다는 방안에 재검토가 필요하다. 렛츠런파크 서울은 수십 년간 시민들의 기억이 쌓인 공간이자, 말(馬)이라는 생명체와 교감하는 스포츠, 문화 거점이다. 선진국들이 도심 요지에 경마장을 유지하는 이유는 그것이 도시의 품격과 역사성을 대변하는 유산이기 때문이다.
또한 경마는 단순 유흥이 아닌 거대한 산업 생태계다. 말 생산 농가부터 육성, 조련, 연관 서비스업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종사자의 생계가 달린 1차~3차 산업의 집약체다.
경마장 이전에는 막대한 비용이 든다. 토지 구매 비용을 제외하고도 약 1조 2000억 원이 넘게 들어간다는 게 마사회의 추산이다. 토지 비용과 기반 도로 등을 닦는 비용을 고려하면 2조 원을 훌쩍 넘길 전망이다.
9800세대의 아파트를 짓기 위해 적절한 대체부지도 없이 2000만 수도권 시민들의 휴게 공간이자 문화 자산인 경마장을 허물어야 할 것인가. 다른 선진국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고 그게 그 도시들의 매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