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하 13도의 한파가 몰아친 지난 8일 일요일 오전. 경기 평택의 하나은행 외국인센터 앞에는 두꺼운 점퍼와 목도리로 무장한 외국인 30여 명이 줄을 길게 늘어섰다. 이들은 오전 10시에 시작되는 은행 업무를 보기 위해 이른바 ‘번호표 오픈런’에 나선 것이다. 통역을 거쳐야 하는 외국인의 경우 상담 시간이 길어 조금만 늦어도 한두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경우가 적지 않아서다. 오픈 전부터 모인 손님에 은행은 30분 일찍 대기실을 열었다.
네팔 출신 마가르 티카(39)도 그중 한 명이다. 평택의 한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는 그는 이날 집에서 약 40분 거리의 이곳을 찾았다. 네팔에 가족을 두고 홀로 한국에서 일하는 그는 “모바일 앱으로는 일요일에도 송금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계좌 개설과 앱 가입을 위해 방문했다”고 말했다. 평일에는 잔업이 잦은 그에게 일요일에도 문을 여는 영업점이 사실상 유일한 선택지다. 그는 이날 상담 창구에 설치된 통역기로 창구 직원과 소통했다.
하나은행은 2003년부터 외국인 밀집 지역 인근에서 일요일 영업점을 운영해 현재 전국 17곳으로 늘렸다. 외국인 고객 수가 최근 5년 새 연평균 6%씩 늘고 있어서다. 김상봉 하나은행 외국인손님마케팅부 팀장은 “외국인이 많이 모이는 교민 행사 등과 연계해 계좌 개설 지원, 금융 교육 프로그램 등을 운영 중”이라고 설명했다.
최근 은행권이 외국인 대상 금융 서비스를 ‘미래 성장 시장’로 주목하고 있다. 외국인은 그동안 신용 이력 부족과 출국 시 사후 관리 문제로 은행 입장에서 위험이 큰 고객이었다. 그러나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이 늘면서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 법무부에 따르면 국내 체류 외국인 수는 지난해 기준 278만 명으로 2015년 190만 명 보다 약 46% 늘었다. 통계청 집계 결과 외국인의 총소득 중 국내외로 송금(지출)하는 비중은 23.2%로 생활비 다음으로 높다. 연평균 송금 횟수는 9.8회에 달한다. 비전문취업(E-9) 체류자의 경우 소득의 절반 이상(56.5%)을 본국으로 송금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계좌 개설과 급여 이체만 확보해도 반복적인 송금 거래가 발생하고, 카드 사용과 저축으로 자연스럽게 거래가 확장된다”며 “외국인을 장기 고객으로 보기 시작한 배경”이라고 설명했다.
외국인 고객을 붙잡기 위한 경쟁은 점점 치열해지고 있다. 신한은행은 ‘신한SOL글로벌’, 하나은행은 ‘Hana EZ’, 우리은행은 ‘우리WON글로벌’ 등 외국인 전용 앱을 통해 전용 금융상품과 생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특화 서비스도 다양해지는 추세다. 우리은행은 외국인 고객을 위한 일자리 정보를 앱에 제공하며, 제주에는 외국인 자산가를 겨냥한 글로벌 PB(프라이빗뱅킹) 영업점도 열었다.
이제 은행들은 한 단계 더 나아가 대출 시장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외국인 고객은 전형적인 ‘씬파일러(신용평가에 활용할 데이터가 거의 없는 차주)’다. 국내 신용카드 이용이나 대출 상환 이력이 부족해 기존 신용평가 모델로는 판단이 쉽지 않다. 이에 일부 은행은 외국인 고객 확보를 위해 급여 이체 내역, 재직 정보, 체류 자격과 잔여 체류 기간, 예·적금 잔액 등 대체 데이터를 신용평가에 반영하기 시작했다.
다만 대출 한도는 수백만원에서 많게는 3000만원 수준으로 제한하고 있다. 대출 만기도 여권이나 비자에 명시된 잔여 체류 기간 이내로 설정하고 있다. 금리는 상대적으로 높은 편이다. 외국인 신용대출 금리는 연 5~18% 수준으로 중·저신용자 대출이나 카드론과 비슷하다. 은행권 관계자는 “신용 이력과 체류 안정성의 불확실성이 위험 프리미엄으로 반영된다”고 설명했다. 다만 일부 외국인 근로자에겐 출신국 금리가 한국보다 높은 경우가 많아 경쟁력 있는 선택지다.
시중은행 가운데선 하나은행이 지난해 8월 외국인 근로자 대상 신용대출 상품을 출시했다. 신한은행과 NH농협은행이 뒤를 이었다. 지방은행에는 외국인 대출이 사실상 생존 전략에 가깝다. 지방소멸로 거점 지역 내국인 고객 기반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산업단지·농축산 현장에 새로 들어오는 인구는 사실상 외국인이 전부라서다. JB금융그룹은 외국인 특화 전략을 통해 그룹 차원의 외국인 대출 잔액을 1조원 이상으로 키운다는 구상도 내놨다.
정부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지난해 초 모바일 외국인등록증 발급을 시작했고, 시중은행에서 이를 실명확인 수단으로 활용한 계좌 개설과 금융거래를 허용했다. 아울러 금융당국은 ▶중요 금융서류의 외국어 번역본 제공 ▶모바일·인터넷뱅킹 외국어 지원 확대 ▶외국인 특화 점포 안내 강화 등에 나섰다.
이민환 인하대 글로벌금융학과 교수는 “안정적인 일자리를 가진 외국인이 금융 서비스에서 소외되는 등 체류 환경이 불안해지면 불법 체류 등으로 오히려 사회적 비용이 커질 수 있다”며 “외국인 금융 접근성 확대는 은행의 신규 고객 확보 차원을 넘어, 외국인 근로자의 국내 정착과 노동력 확보라는 정책 목표와도 맞닿아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