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이 오기를 학처럼 길게 목을 빼고 기다리던 옛날이 있었다. 도시에 나가 직장생활을 하는 형과 누나가 돌아오기 때문이었다. 설 전날이나 당일에 오기도 했는데 내 관심사는 그들이 사 오는 선물에 있었다. 70년대엔 각종 과자가 들어 있는 ‘종합선물세트’가 유행이었다. 공고를 졸업한 형은 안양의 공장에서 근무했고 누나는 강릉에서 버스 안내양으로 일했다. 산골 마을에 완행버스가 도착할 시간이면 눈보라가 일렁거리는 정류장으로 달려나갔다. 손과 발이 시려 오는 걸 참으며 신작로의 서쪽과 동쪽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일이 바쁜 누나는 설날에 오지 못할 때가 더 많았다. 형까지 함께 못 오는 해는 서럽기 그지없었다.
늙으신 엄마가 계시는 고향
간밤에 이불 투정하는 꿈 꿔
궁금해지는 엄마 주름진 얼굴
대관령 산골짜기 외딴 우리 집엔 아직 전기도 들어오지 않던 시절이었다. 당연히 전화, 텔레비전도 없었다. 신작로 옆 전기가 들어오는 건넛마을이 부러웠다. 엄마는 등잔불 아래서 상 위에 쏟아놓은 콩을 골랐고 아버지는 꿩을 잡기 위해 가느다란 송곳으로 콩에 구멍을 뚫었다. 나와 작은누나는 입을 닷 발이나 내민 채 방바닥에 엎드려 만화책을 넘겼다. 형도 누나도 오지 않은 어느 섣달그믐날 밤이었다. 창호지를 바른 문밖으로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등잔불이 흔들렸다. 나는 무슨 소리라도 들리면 벌떡 일어나 눈꼽재기창에 얼굴을 대고 집으로 들어오는 눈길을 살폈다. 그러다 결국 포기하고 잠을 자면 눈썹이 센다는 엄마의 말도 무시한 채 솜이불 속으로 들어가 형과 누나를 원망하다가 잠들었다.
설날 아침엔 큰댁으로 차례를 지내러 갔다. 큰댁엔 코흘리개 사촌들이 북적거리며 빨리 차례가 끝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차례상 위에는 평소 먹어보지 못한 음식들이 즐비했다. 음식을 먹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아침을 먹은 뒤의 세배였다. 친척 어른들로부터 받을 세뱃돈에 온 신경이 집중돼 있었다. 올해는 과연 얼마를 받을 것인가. 세뱃돈을 모아 사고 싶었던 걸 꼭 사야만 하는데. 큰아버지와 큰어머니, 이북 출신이라 남쪽에 친척이 없는 고모부 둘과 고모 둘, 그리고 아버지와 엄마에게 세배했다. 기대는 컸는데 실적은 저조했다. 오백 원짜리 지폐가 나온 건 큰아버지의 지갑뿐이었다. 사촌들의 인원수가 많은 것도 문제 중의 문제였다. 인근의 작은할아버지댁으로 몰려갔으나 거기도 백 원짜리 지폐가 전부였다. 다른 친척 집에서는 세뱃돈 대신 군것질거리만 내놓았다. 나는 우울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홀로 집으로 돌아왔다. 마을의 친한 친구들 집에 세배를 가볼까도 생각했는데 친척들에게서도 나오지 않은 세뱃돈을 거기서 받을 확률은 희박했다.
우리 코흘리개 사촌들이 세뱃돈에서 점점 멀어지면서부터 친척 어른들도 하나둘 세상을 뜨기 시작했다. 설날 아침 다 함께 큰댁에 모여 더 이상 차례를 지내지도 않게 되었다. 가끔 부모님께 세배를 오던 사촌들도 살 곳을 찾아 고향을 떠났다. 서로 연락하는 일도 소원해졌다. 친척이란 관계가 예전 같지 않다는 걸 실감하는 세대가 되었다. 그렇다 보니 이젠 설날에 가족들끼리만 고향 집에 모인다. 게다가 누나들은 시댁으로 찾아가니 형제들마저 반토막이 된 명절을 보낸다. 다행인 점은 그 세월 동안 조카들이 등장했다는 것이다. 조카들의 자식들에게 나도 세뱃돈을 주어야 하는 나이가 되었으니 이걸 기뻐해야 하나, 슬퍼해야 하나. 삼촌이었던 호칭이 작은아버지에서 작은할아버지로 바뀌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 옛날의 어른들도 나 같은 생각을 하며 옹졸하게 세뱃돈을 깎았을까.
설날이 돌아오면 늙으신 엄마가 계시는 고향으로 간다. 간밤 꿈엔 겨울밤 내가 덮고 있는 이불을 끌어가 덮는 엄마에게 고래고래 화를 냈다. 장롱 속에 이불이 많은데 왜 아끼는 거냐고. 새 이불은 언제 덮을 거냐고. 꿈속의 엄마는 눈물만 흘릴 뿐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대체 왜 이 모양인가. 꿈에서라도 그러면 안 되는 거였다. 그런데 그 꿈은 내 마음의 무엇이 뒤틀려 있었기에 찾아온 것일까. 세상을 살아가면서 여기저기서 넘어진 내 마음의 울화를 엄마에게 쏟아부은 것은 아닐까. 이번에 고향에 가면 점점 작아지는 엄마의 주름 가득한 얼굴을 오래 들여다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