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에게 국제투자분쟁(ISDS)은 공포다. 지난해 말 론스타 사태가 한국 정부 완전 승소라는 대반전 해피엔딩으로 끝나긴 했지만, 미국계 사모펀드 하나가 10년 넘게 온 나라를 흔들며 우리 세금 수조 원을 가져갈 수 있다는 걸 목격한 탓이다. 다야니(이란)·메이슨(미 사모펀드) 등 수천만 달러씩 물어줘야 하는 정부 패소 사례도 한몫했다.
쿠팡 측, ISDS로 한국 정부 압박
정권 교체마다 전 정부 실책 공개
정보 노출 많고 만만해 집중 타깃
권력자·정치인 과격 발언도 불리
그런 한국인 보란 듯이, 쿠팡의 미국 주요 투자자 두 곳(그린옥스·알티미터)이 지난달 22일 한국 정부를 상대로 ISDS 중재의향서를 제출했다. 90일 후엔 정식으로 중재를 제기할 수 있다. 이들은 정말 중재를 제기하려는 걸까, 단지 한국 정부 압박용 카드로 내민 걸까. 또 만약 제기한다면 한국 정부는 유리할까, 불리할까.
이런 궁금증을 갖고 지난달 31일 김갑유 피터앤김 대표 변호사를 만났다. 그는 이번 쿠팡 사건과 연결고리는 없지만, 론스타 중재 13년 내내 한국 정부 측 대리인을 맡아 승소로 이끈 국내 최고 국제중재 전문가다. 이미 정부가 한 번 패소한 미 헤지펀드 엘리엇 사건 항소도 맡아 최종 판결을 앞두고 있다. 배경 파악은 물론 대응책 조언의 적임자라는 얘기다. 김 변호사는 "지금 단계에선 쿠팡 측 승산이 크지 않다"면서도 세 가지 전제조건을 달았다. 바로
무관심·배려심(형평성)·말조심이다. 무슨 얘기일까. 다음은 일문일답. 안혜리 논설위원.
Q : -쿠팡 투자자(이하 쿠팡 측)가 국제중재 강수를 꺼냈다. 예상했나.
A : 그렇다. 삼성·현대차 등도 미국 주주는 있다. 과거 그 기업 회장들이 국회 청문회 불려 나갈 때 미국 주주가 뭐라고 한 적이 있나? 없다. 그런데 개인정보 유출과 관련해 국회가 김범석 쿠팡Inc 의장을 핵심증인으로 불렀을 때는 쿠팡과 쿠팡 측 대응 모두 국민이 기대하는 방식과 달랐다. 잘못 인정과 신속한 후속 조치를 기대했는데, 쿠팡은 협조 대신 정부와 다투는 방식으로 갔다. 쿠팡 측은 ('구실을 내세운 공격'이라며) 정부를 압박하는 중재를 꺼내 들었다. 처음부터 ISDS 행 의도 여부는 알 수 없으나, 법률 분쟁으로 가는 과정처럼 보인다. 법적 공방에선 협조보다 다투는 방식이 더 좋다. 쿠팡이 언론의 과도한 관심을 원할 수 있다.
Q : -문제 당사자 쿠팡이 언론 입막음 아닌 관심을 선호한다고?
A : 국민이 너무 화가 나, 언론이 난리 치고, 정부는 그런 압력을 받아 취하면 안 되는 지나친 조치를 내리는 등 오버하면 최악이다. 그게 론스타 사건이다. 론스타는 정치권과 언론의 압박 탓에 한국 정부가 론스타의 정상적인 외환은행 매각 승인을 지연하고 가격 인하 압박을 해 손해 봤다고 주장하며 중재를 제기했다. 정치권과 언론이 쿠팡에 관심을 좀 덜 가졌으면 좋겠다. 국민의 과도한 관심이 의도치 않게 쿠팡을 도와주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어서다. 분노 대신 '
무관심'이 필요하다.
Q : -론스타는 결국 한국 정부가 승소했는데.
A : 언론과 정치권 압박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가 법과 원칙에 따랐다는 걸 인정받았기에 가능했다. 정부는 원래 정책 재량권이 있다. (매각 승인 등) 인허가 과정에서 형사 절차 진행이나 법 위반이 있어도 무조건 해줘야 하나, 아니면 절차를 다 거친 다음에 해도 되나. 다들 품고 있던 질문이라 전 세계 정부가 론스타 판정을 눈여겨보는 와중에 '한국 정부가 론스타의 주가 조작 사건 판결이 나올 때까지 기다린 건 잘못이 아니다'라고 인정받았다. 정부의 금융 규제 재량권 테스트를 한국 정부가 견뎌낸 거다. 한국 시스템의 승리였다.
Q : -한국은 여전히 절차적 정당성을 지키는 나라인가.
A : 맞다. 설령 정부가 잘못해도 법원이 바로잡는다. 세무조사로 론스타에 부과한 법인세 가운데 1700억원은 한국 법원이 취소 판결로 해결해줬다. 여기서 우리가 꼭 생각할 게 있다. 과거 론스타처럼 지금 쿠팡도 마찬가지인데, 기업에 미운털 박히면 정부와 국회가 세무조사나 국정조사 등 전방위적 압력을 행사한다. 한국 기업에는 당연한데, 외국 기업은 이게 너무 가혹하고 국제적 기준에 안 맞는다고 문제 삼는다. 외국 기업이 문제 제기하는 일은 국내 기업에도 하면 안 된다. 우리가 그동안 국내 기업에만 너무 과했던 게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
배려심(형평성)' 얘기다.
Q : -국제중재에선 그 나라에서 일반적이라면 부당한 압박도 괜찮나.
A : 대체로는 그렇다. 투자자 자국 기준과 다르다는 정도로는 타 정부 상대로 승소 못 한다. 한국 정부가 쿠팡에 하는 압박을 비슷한 사례에 놓인 한국 기업에 똑같이 해왔다면 외국 투자자를 차별했다고 볼 근거가 없다.
Q : -차별만 아니면 괜찮나.
A : 그건 아니다. 공정과 형평(Fair & Equitable) 원칙에 맞아야 한다. 형평은 비교다. "국내 기업과 똑같이 대했으니 차별은 아니다"가 형평인데, 이것만으로는 안 된다. 절차적 정당성 등 공정해야 한다.
※쿠팡 측은 지난달 22일 ISDS에 중재의향서를 제출하는 동시에 미 무역대표부(USTR)에도 통상법 301조에 근거해 통상 보호 조처를 요청했다. 청원서엔 '한국 정부가 쿠팡을 상대로 범정부적 공격을 전개하고 있고, 과도한 대응은 이재명 대통령 등 최고 권력 차원에서 시작됐다'고 썼다. 또 공정위가 반독점 아닌 데이터 유출로 조사 시작한 걸 예로 들었다.
-공정위 등 10여개 부처의 전방위적 쿠팡 조사는 공정을 어긴 걸까.
공정위는 개인정보 유출이든 뭐든, 계기가 있어 어떤 기업이 관심 대상이 됐다면 공정거래법 관련 사안은 제대로 하고 있는지 조사할 수 있다. 영업정지도 요건만 맞는다면 문제가 안 된다. 그 과정에서 위법 행위를 하거나 잘못하지 않았는데 처벌하면 문제다.
Q : -쿠팡 측은 중재의향서에 이재명 대통령과 김민석 총리 발언을 문제 삼았다. 불리하게 작용하지 않나.
A : 불리하다. 권력자나 정치인이 국회 청문회나 대정부질문에서 한 사실과 다른 단정적 표현이나 언론 보도 전부 상대편에 유리한 증거가 된다. '
말조심'해야 한다. 비단 국제중재가 아니어도 경제의 상당 부분을 글로벌 시장에 의존하는 입장에서 괜한 싸움의 빌미를 줘선 안 된다. 이재명 정부 생중계 국무회의 발언이 언제 불리한 증거로 쓰일지 모를 일이다. 물론 대통령이나 고위 관료 발언이 곧 정부 행위는 아니다. (이 대통령의 값비싼 생리대 문제 제기 후 세무조사 등 정부 부처의 일사불란한 움직임처럼) 실제로 구체적 정부 조치로 이어졌다 해도 그 과정에서 절차를 다 지키는 등 위법한 권력 남용이 없거나, 심지어 정부의 위법이 있어도 행정소송 등 사법적 구제 절차가 있다면 큰 문제는 안 된다. 투자자 보호가 남의 나라 내정 간섭이나 주권 침해하라는 뜻은 아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할 때 중재 도입하면 나라 말아먹는다고 반발했지만, 남용을 막는 조항이 상당 부분 들어가 있다.
※이 대통령은 지난해 12월 "(약한) 처벌은 효과 없다. '무슨 팡'인가 하는 곳도 규정 어기지 않았나. 처벌이 두렵지 않은 것, 망할 게 두려울 정도로 처벌 세게 해야 한다"고 했다. 김 총리는 쿠팡에 대한 직접 언급 없이 "마피아 소탕할 때 같은 각오"를 얘기했다.
Q : -그렇다면 말조심할 이유는 뭔가.
A : 상대편 주장에 상당한 힘이 실리기 때문이다. "정부는 절차를 내세우지만 실은 외국 투자자를 차별하려는 의도가 뒤에 숨어있다"고 중재판정부를 설득할 근거를 우리가 제공하는 셈이 된다. 국회의 과격한 주장이나 쿠팡 바로잡기 TF 같은 활동 뒤에 실제 입법이 이어지면 명백한 정부 행위라 더 불리하다.
※김범석 의장이 불출석한 지난해 12월 과방위 청문회에서 여당인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은 "대한민국과 공존을 거부하는 반사회적 기업"(조인철)이라거나 "특별법 제정 통해 매출 10% 과징금 부과해야 한다"(이훈기)는 강경 발언을 쏟아냈다. 민주당은 1월 27일 출범 예정이었던 쿠팡 바로잡기 TF를 사실상 무기한 연기했다. 쿠팡이 한미 관세 협상 악재로 등장하고, 미 하원이 오는 23일 법사위 청문회에 해럴드 로저스 한국 쿠팡 대표를 소환하는 등 압박 수위를 높이는 데 따른 조치다.
Q : -쿠팡 측이 중재를 제기할까. 한다면 유리할까.
A : 뭐든 쿠팡 측이 시늉만 한다는 식으로 가볍게 생각해선 절대 안 된다. 동시에 지레 겁먹고 정부가 원래 해야 할 조사를 멈춰서도 안 된다. 공정거래법이든 노동법이든 잘못한 게 있다면 바로잡는 게 정도다. 정식 제기 전 90일 동안 충분한 협상을 통해 오해를 푸는 등 담담하게 대응해야 한다.
Q : -한국이 유독 ISDS 집중 타깃이 되는 이유는.
A : 만만하고, 정보가 많다. 미·중이 한국 기업을 명백하게 차별해도 더 큰 후폭풍이 두려워 우리는 제기 못 한다. 우리 정부는 누가 중재 건다고 보복 안 한다. 또 우리 기업은 다른 나라 정부가 뭘 했는지 알 수 없다. 우린 정권 바뀔 때마다 이전 정부 정책 결정이 전부 외국 기업에 다 밝혀진다. 이런 나라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