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승완 감독의 새 영화 '휴민트'가 11일 개봉했다. 류 감독이 영화 '베를린'(2013) 이후 13년 만에 선보이는 첩보 영화로, 이번 설 연휴 최대 기대작으로 꼽혔던 작품이다. 남북 간 첩보물이라는 세계관은 '베를린'에서 이어지지만, 복잡한 국제 정세는 덜어내고 첩보와 멜로에 집중했다. 요즘 한국 영화계에선 기대감이 큰 작품일수록 평가가 박하다는 푸념이 나오지만, '휴민트'의 출발은 성공적이다. 이날 새벽 개봉 직전 예매율은 38%(예매 관객 19만명)를 기록했고 개봉 후 포털사이트와 영화관 예매 사이트의 관람객 평점도 9점대에 안착했다.
러닝타임 119분인 이 영화는 동남아에서 마약 루트를 쫓는 국정원 블랙요원 조 과장(조인성)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자신의 휴민트(정보원)가 희생돼 괴로워하던 조 과장은 블라디보스토크 작전에서 새로 포섭한 휴민트 채선화(신세경)를 제때에 구출하려는 강한 동기를 가졌다. 하지만 평양에서 파견 나온 북한 보위성 조장 박건(박정민)이 나타나며 채선화를 둘러싼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감정의 중심축이 조인성에서 박정민으로 넘어가며 몰입도도 커진다. 신세경과 처연한 멜로 연기를 펼치는 주인공도, 북한 총영사관(박해준)의 음모에 빠져 처절한 사투를 벌이는 것도 박정민이기 때문이다. 얼핏 연적 관계가 될 것 같았던 조인성과는 후반부에 급격한 '브로맨스'를 형성한다.
첫 멜로 주연에 도전하는 박정민의 짙은 눈빛 연기는, 지난해 청룡영화상 당시 화사와 호흡을 맞추며 화제가 된 '멜로 눈빛'을 연상시킨다. 사람의 몸에 사정없이 다트를 꽂는 냉혈한이지만, 잊지 못한 연인과 재회한 뒤 감정적으로 무너지는 모습을 실감나게 그렸다. 박정민은 최근 인터뷰에서 "채선화의 가족 문제조차 원칙대로 처리했던 박건이, 이번에는 채선화를 실망시키지 않겠다는 감정을 처절하게 표현했다"며 "그동안 겪어온 숱한 이별들이 이번 연기의 자양분이 됐다"고 말했다. 스크린에서 좀처럼 보기 어려웠던 신세경이 패티김의 '이별'을 나즈막히 부르며 사연 있는 북한 여성으로 복귀한 모습도 관전 포인트다. 신세경도 이번 역할을 위해 "평양 사투리를 따로 배웠다"고 했다.
관객의 통각을 자극하는 류승완표 육체파 액션신은 이번에도 유효했다. 특히 박건이 여성 국정원 요원 임 대리(정유진)와 좁은 복도에서 뒤엉켜 싸우다 함께 계단으로 굴러 떨어지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류 감독은 박정민에겐 "멋있게 싸우지 말고 처절하게 싸워달라"는 주문을 했다고 한다. 반면 조인성은 긴 팔다리가 돋보이는 시원시원하고 절도 있는 액션을 선보인다. 조인성은 11일 인터뷰에서 "이를 위해 국정원에서 사격 자세뿐 아니라 총기 반동, 재장전 타이밍, 발사 가능한 총알 개수까지 교육을 받았다"고 말했다.
결과적으로 영화는 남·북 간 첩보물이란 전형적인 소재를 긴장감 넘치는 액션과 절제된 멜로에 담아내며, 한국 영화의 흥행 공식을 성실히 따랐다. 다만 류 감독은 남남북녀의 사랑을 피하고 북한 요원에게 이야기의 중심축을 넘기는 등 클리셰를 살짝 비튼 조리법으로 기시감을 희석시켰다.
넷플릭스 시리즈 '폭싹 속았수다'에서 순애보 연기를 펼치던 박해준이 능글능글하게 펼치는 교활한 연기도 극의 재미를 더하는 포인트다. 이 영화에서 여성은 주로 약자와 피해자의 위치에 있는 구출 대상이지만, 결정적인 순간 차를 거칠게 몰고 총을 쏘며 나타난 임 대리 역 정유진은 또다른 조연 배우의 발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