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사이 내린 함박눈이 켜켜이 쌓인 11일(현지시간) 이탈리아 리비뇨 스노파크. 작은 마을 한복판의 스노보드 경기장이 각국 국기를 든 인파로 북적인다. 메달이 걸린 경기도 아닌, 12명의 결선 진출자를 가리는 예선임에도 스탠딩 관중석에는 서 있을 자리를 찾기가 어렵다.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의 빅 이벤트, 스노보드 하프파이프 여자 경기의 막이 마침내 올랐다. 젊은 세대의 폭발적인 성원을 앞세워 세계적인 스포츠로 발돋움한 스노보드. 그중에서도 화려한 기술과 힙(hip)한 이미지로 하나의 문화적 현상이 된 하프파이프는 이제 한국에서도 적지 않은 인기를 자랑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세계 정상급 선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2008년생의 ‘여고생 스노보더’ 최가온(18·세화여고)이 있다.
최가온이 이제 자신의 이름처럼 ‘세상의 중심’으로 도약할 준비를 모두 마쳤다. 이날 최가온은 하프파이프 여자 예선에서 82.25점(1차 점수)을 받아 전체 24명 중 3위를 기록했다. 이어진 2차 시기엔 회심의 프런트사이드 1080을 시도했지만 착지 과정에서 살짝 넘어졌다. 이로써 최가온은 예선 6위로 상위 12명에게만 주어지는 결선행 티켓을 따냈다.
하프파이프는 1차와 2차 시기 가운데 더 높은 점수를 해당 선수의 기록으로 삼는다. 1차 시기 9번째 주자로 나선 최가온은 주특기인 스위치 백사이드 720로 주행을 시작했다. 이어 백사이드 900과 프런트사이드 720 등의 기술을 차례로 성공시켜 고득점을 확보했다.
최가온은 이번 대회의 강력한 금메달리스트 후보다. 올 시즌 국제스키스노보드연맹(FIS) 월드컵에서 3회 연속 우승하며 세계가 주목하는 선수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단순히 실력만이 최가온을 눈여겨보도록 하지는 않는다. 역경을 이겨낸 성장 드라마가 소녀의 비상을 더욱 빛나게 한다. 최가온은 2024년 1월 스위스 락스에서 1080도를 회전하는 기술을 연습하다가 크게 다쳤다. 헬기로 이송된 병원에서 허리 골절 진단을 받아 핀을 박았고, 이후 세 차례나 수술을 받았다.
최가온은 당시를 떠올리며 “아픔보다는 대회를 뛰지 못한다는 아쉬움이 커 여러 날을 눈물로 지새웠다”고 했다. 10대 소녀에겐 상처로 다가왔을 시간. 평소 “스노보드 없는 삶은 무의미하다”는 말을 되새기는 최가온은 악바리처럼 재활에만 매진했고, 올 시즌 월드컵 3회 우승으로 일어섰다.
한편 이번 대회 하프파이프는 최가온과 클로이 김(26·미국)과의 맞대결로도 눈길을 끈다. 클로이 김은 2018년 평창 대회와 2022년 베이징 대회에서 연거푸 우승한 명실 공히 이 종목 1인자. 그러나 올 시즌 어깨 부상으로 만족스러운 성적을 내지 못했고, 그 사이 몰라보게 발전한 최가온이 선배의 아성을 넘보는 도전자가 됐다.
사실 최가온과 클로이 김은 깊은 인연으로 묶인 사이다. 최가온이 몇 년 전 뉴질랜드 전지훈련 도중 잘못 넘어져 응급실로 이송된 일이 있었다. 이때 클로이 김이 함께 따라와 통역을 해주며 치료를 도왔다. 이후 둘은 비밀도 공유하는 절친한 사이가 됐다. 클로이 김은 “최가온은 어릴 적 나를 보는 것 같다”며 진한 애정을 드러냈다.
그러나 승부는 승부. 클로이 김은 1차 시기에서 다양한 고난도 기술을 완벽하게 구사했다. 속도감과 높이, 회전력에서 상대를 압도하며 90.25점을 받아 전체 1위를 기록했다. 이들의 진검승부로 펼쳐질 결선은 한국시간으로 13일 오전 3시 30분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