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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치문의 검은 돌 흰 돌] 19살 김은지의 외길 인생

중앙일보

2026.02.11 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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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치문 바둑 칼럼니스트
바둑TV에서 이런 대화가 오간다. “포스트 신진서는 누구일까요.” “남자는 통 안 보이네요. 여자인 김은지(사진)가 외려 유망해 보입니다.”

여자 바둑기사 김은지 9단은 올해 19살인데 휴대폰이 없다. 한창 호기심이 넘칠 나이인데 휴대폰 없이 어찌 살까 싶지만 이런 질문에 김은지는 그냥 빙긋 웃는다. 동료기사들이 즐겨 찾는 카페에도 가지 않는다. 그의 하루는 온통 바둑뿐이다.

휴대폰도 없이 온종일 바둑만
자기 재능 발견한 건 행운이지만
바깥세상 경험하면 어떻게 될까

6살 때 바둑과 인연을 맺었다. 어머니의 권유로 동네 바둑학원에 갔다가 천생연분을 만난 것이다.

학원은 낮 12시에 문을 열고 저녁 7시에 닫았다. 6살 김은지도 매일 12시에 출근하여 7시에 퇴근했다.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김은지는 바둑이라는 만화경 속으로 한없이 빨려 들어갔고 깊이 매혹되었다. 6살 어린이에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아마도 김은지만이 가능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3년을 그렇게 보냈다.

9살 때 전문적인 수업을 받기 위해 장수영 도장으로 갔다. 학교는 아예 다니지 않았다. 홈스쿨링과 검정고시로 초등학교를 대신했다. 학교에 가 친구들과 어울려 놀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는가 물었더니 역시 조용히 웃으며 고개를 젓는다.

인생살이에서 자신의 재능이 뭔지 안다는 것은 참 중요하다. 유치원생의 모든 부모가 내 아이의 재능이 뭘까 고심하며 여기저기 학원에 보낸다. 그렇게 해서 재능과 해후한 사람들은 운이 아주 좋다. 재능이 아닌데도 길을 잘못 들어 평생 씨름해야 하는 사람들은 운이 나쁘다.

김은지는 자신의 재능을 단번에 만났다. 어린 시절 백지처럼 하얀 머릿속에 오직 바둑만을 그려 넣었다. 휴대폰도 없지만 TV도 거의 보지 않는다.

헝가리의 유명한 여자 체스선수 폴가르 유디트를 다룬 ‘체스의 여왕’이란 다큐가 있다. 유디트는 12세 때 여자 1위가 된 이래 26년간 그 자리를 지켰고 드디어 부동의 세계최강 가리 카스파로프를 꺾는다. 여러 번의 대결 끝에 딱 한 번 이겼지만 그 파장은 엄청났다.

유디트의 아버지는 자신의 딸을 체스선수로 키워냈다. 학교는 보내지 않았고 홈스쿨링을 했다. 공산 치하의 가난하고 엄혹한 헝가리에서 이게 최선이라고 믿었다. 그 믿음은 적중해서 유디트는 체스에 매혹됐고 이윽고 체스의 역사에 큰 획을 그었다. 재미있는 것은 바둑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똑같은 질문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여성세계챔피언은 언제쯤 나올까요.”

유디트가 받았던 이 질문을 김은지도 받아봤을 것이다. 마음 저 깊은 곳에선 세계최강 신진서를 꺾는 모습을 그려봤는지도 모른다. 아직 그 꿈은 멀다. 김은지의 랭킹은 이제 22위. 최정 9단이 14위를 찍은 적이 있다. 김은지가 그 한계를 넘어서서 신화를 쓸 수 있을까.

김은지는 승마를 좋아한다. 겁이 없어서 승마를 남보다 쉽게 배웠다. 추리소설도 좋아한다. 한번 잡으면 질리지 않아 끝까지 본다. 현재로는 이 두 가지가 김은지가 바깥세상을 엿보는 통로다.

김은지에게 이창호의 ‘수능’ 얘기를 해줬다. 이창호 9단은 1993년 러시아 볼가강 선상에서 국수전 도전기를 두었다. 상대는 스승 조훈현 9단. 한데 이창호는 대국이 끝나자마자 나머지 일정을 포기하고 혼자 서울로 왔다. 아무도 이유를 몰랐지만 실은 당시 고교 3학년이었던 이창호는 수능을 보려고 급히 온 것이다.

이창호는 바둑판 361로 밖의 다른 세상에 대한 갈증이 있었고 수능을 치러 대학에 가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본래 찬반이 있었다. 외부에서는 이창호 같은 바둑의 고수가 더 넓은 세상을 보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궁금해했고 선배 프로기사들은 이창호 바둑이 위험해진다며 대부분 반대했다. 이창호는 결국 수능을 포기했고 대신 독서광이 됐다.

김은지는 아직 남자친구가 없다. 하루 종일 바둑과 함께 돌아가는 일정이라 누군가를 만날 기회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김은지는 19살 성년이다.

다시 체스의 유디트 얘기로 돌아가면 유디트는 20대가 되어 연인을 만나 결혼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더 성적을 낸다. 카스파로프도 이때 꺾는다. 바깥세상에 대한 경험이 바둑에 플러스가 될지 마이너스가 될지 그건 아무도 모른다.

박치문 바둑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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