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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만에 새로운 고개 넘는 아리랑 [이지영의 문화난장]

중앙일보

2026.02.11 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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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영 문화스포츠부국장
긴 공백기를 깨고 마침내 복귀하는 방탄소년단(BTS)이 새 앨범 ‘아리랑(ARIRANG)’을 들고 온다. 넷플릭스 생중계까지 예정된 다음 달 21일 서울 광화문광장 공연을 시작으로 전 세계 34개 도시를 도는 월드투어에 나선다. 민요 아리랑이 세계 대중음악 무대에 최신 콘텐트 IP로 등장하는 것이다. 아리랑으로선 민족의 노래에서 세계의 노래로, 또 하나의 고개를 넘으려는 순간이다.
BTS 새 앨범 '아리랑' 내달 발매
1926년 영화 '아리랑'의 주제가
우리 생활 민요, 정서 언어에서
세계 팝시장 뒤흔드는 IP 되나

창작뮤지컬 ‘몽유도원’의 한 장면. 민요 아리랑을 변주한 넘버가 세 곡이나 들어가 도미와 아랑의 사랑 이야기에 극적 효과를 더한다. [사진 에이콤]
고종도 즐긴 노래…애국가 역할도
아리랑은 특정 곡 제목이 아니라 ‘아리랑’ 혹은 ‘아라리’ 같은 후렴구를 가진 노래를 통칭한다. 언제부터 불리기 시작했는지 기원도 모르고, 단일한 원형도 없다. 지역과 세대를 거치며 무수한 갈래의 가사와 가락으로 나뉘어 전승됐다. 이 유동성이 바로 아리랑의 생명력이다. 이별과 그리움, 체념과 저항, 연대와 희망이 시대마다 덧붙여지며 아리랑은 우리 민족에게 하나의 정서적 언어가 된다.

아리랑은 일상의 노래이기도 했다. 일터에서, 길 위에서, 잔치와 이별의 자리에서 불리던 생활 민요였다. 1896년 아리랑 악보를 처음 채록한 미국인 선교사 호머 헐버트는 “조선인들에게 아리랑은 밥과 같은 존재”라고 전했다. 조선 말기 황현이 쓴 역사서 『매천야록』에는 1894년 고종이 궁 안으로 광대들을 불러 아리랑타령을 부르게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임금도 즐기던 노래였던 것이다. 정선아리랑, 밀양아리랑, 진도아리랑 등 수많은 변주들은 아리랑이 한반도 전역에 퍼져있던 노래였음을 보여준다.

지역마다 제각각 불리던 아리랑에 전국적인 공통 버전이 생겨난 데는 1926년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영화의 주인공은 3·1 운동 때 고문을 당해 미쳐버린 대학생 영진이다. 영진은 여동생을 겁탈하려는 악덕 지주를 낫으로 살해하고 체포된다. 일본 순사에게 끌려 아리랑고개를 넘어가는 영진을 바라보며 마을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가 바로 아리랑이다. 영화가 흥행하면서 주제가 아리랑은 망국의 슬픔과 독립 염원을 담은 상징적 노래로 자리 잡았다. 영화 ‘아리랑’의 필름은 소실돼 사라졌지만, 노래 아리랑은 1930년대 유성기 음반(SP)으로 활발하게 제작돼 당시 목소리 그대로 전해온다.

해방과 분단, 전쟁을 거치면서 아리랑의 쓰임새는 더욱 확장된다. 이산가족과 해외 동포에겐 디아스포라의 노래, 고향의 소리가 됐고, 올림픽 등 국제스포츠 대회에서 남북 단일팀이 입장할 땐 애국가 역할도 했다.

문화예술 안에서 아리랑은 다양한 감정과 서사를 싸담는 ‘보자기’로 쓰였다. 지난달 27일부터 서울 국립극장에서 공연 중인 연출가 윤호진의 신작 뮤지컬 ‘몽유도원’에서는 민요 아리랑을 변주한 넘버가 세 차례 나온다. 첫 번째 아리랑이 이별의 장면에서 한(恨)의 정서를 담았다면, 두 번째 아리랑은 삶에 대한 굳은 의지를, 세 번째 아리랑은 희망과 기쁨의 감정을 표출했다. 노랫말 ‘아리랑’과 ‘아라리오’ 사이에 ‘얼씨구’가 들어가 ‘아리랑 얼씨구 아라리오’가 되는 순간, 아리랑은 환희의 송가가 됐다.

서울 세종문화회관 계단에 설치된 BTS 컴백 홍보물. 새 앨범 ‘아리랑’은 3월 20일 발매된다. [연합뉴스]
BTS 버전 단일 이미지로 소비돼선 안 돼
스테디셀러 뮤지컬 ‘영웅’에서 불린 아리랑은 비장한 결의의 노래가 아니라 긴장을 풀기 위한 해학의 장치였다. 채가구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기다리는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우덕순과 조도선, 두 독립투사가 아리랑을 부르며 춤을 추는 모습은 죽음을 각오한 이들의 초월적인 낙천성을 보여준다.

이렇게 한과 희망, 체념과 의지 등을 한 곡 안에 담아낼 수 있었던 건 아리랑이 특정 메시지를 강요하지 않는 열린 구조이기 때문이다. 유네스코도 2012년 아리랑의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 결정을 내리며 아리랑의 다양성과 창조성에 주목한 바 있다.

이제 아리랑은 BTS의 아리랑으로 또 한 번의 전환점을 맞았다. 단순한 전통 재현의 연장선이 아니다. 아리랑은 글로벌 팬덤의 플레이리스트 안에 자연스럽게 들어갈 노래이자, 곧 빌보드 차트에도 올라갈 이름이 됐다.

세계적 인지도를 갖게 된 민요로 가장 유명한 노래는 스코틀랜드의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일 것이다. 옛 친구, 옛 시절에 대한 그리움을 담고 있는 ‘올드 랭 사인’은 전 세계 송년 제야 행사 음악의 단골 레퍼토리다. 우리에겐 “오랫동안 사귀었던…”으로 시작하는 ‘석별의 노래’로 알려져 있고, 안익태 작곡 이전 애국가의 선율로 이용되기도 했다.

BTS의 아리랑은 K팝이라는 주류 산업에 직접 진입한다는 점에서 ‘올드 랭 사인’과도 차별화된다. 전통 민요가 현대 대중음악 시장의 핵심 자산으로 자리매김하는 보기 드문 사례다.

기대만큼 과제도 따른다. 무엇보다 전통의 맥락 없이 이미지로만 소비될 위험을 경계해야 한다. 단순히 한국적 분위기를 내는 장치로만 이용될 경우, 아리랑의 생명력인 정서적 깊이는 증발하고 껍데기만 남게 될지 모른다. 또 BTS 버전의 아리랑이 세계적 기준처럼 소비된다면 다양성이 정체성이었던 아리랑이 단일 이미지 속에 흡수돼버릴 우려도 있다.

지금껏 아리랑은 늘 시대의 요구에 맞게 변주되며 살아 움직였다. 민요에서 민족의 노래로, 국가의 상징으로, 그리고 이제 세계 팝 음악계의 히트곡으로 다시 태어나려 하고 있다. 그 변화의 현장이 곧 펼쳐진다. 마침 올해는 영화 ‘아리랑’이 나온 지 꼭 100년이 되는 해다.



이지영([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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