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료에게 영혼이 없는 것이 미덕을 넘어 생존법이 된 시대다. 최중경(70) 전 장관은 그런 면에선 확실히 예외였다. ‘최틀러(최중경+히틀러)’라는 범상치 않은 별칭까지 달고 살았다. 재정경제부 국제금융국장 시절 역외 선물환 시장에까지 뛰어드는 기습작전으로 환율 방어에 나서자 놀란 트레이더들이 “최중경에 맞서지 말라”며 붙인 것이다. 그의 소신에 대한 평가는 엇갈렸고, 여간해선 굽히지 않는 스타일에 굴곡도 적지 않았다. 차관, 경제수석, 지식경제부(현 산업통상부) 장관을 거치는 중간중간 주필리핀 대사, 국제부흥개발은행(IBRD) 이사 등 다채로운 해외 경력을 갖게 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관세 협상은 ‘상대가 있는 게임’
트럼프 선거 내세울 치적 원해
쿠팡 문제는 감정 빼고 담백하게
길게 보면 외환보유액 확충 필요
대미투자법 서둘러 처리해야
그가 최근 전쟁사를 소재로 한 책(『전쟁에서 배우는 인생전략』·사진)을 냈다. 책은 역사 속 전쟁 사례들을 통해 ‘전략적 의사결정’의 중요성을 설파한다. 10여년 전 미국 싱크탱크인 헤리티지 재단에 머물던 시절의 경험이 집필의 한 계기였다. 당시 미국 동료가 “너희 한국 정부는 왜 그렇게 나이브(naive)한가”라며 작심한 듯 물었던 게 그의 폐부를 찔렀다. 중요한 국제 현안에 전략적 고민 없이 순진하게 대응하는 걸 비꼰 것이다.
마침 한고비 넘어가는가 했던 한·미 관세 협상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느닷없는 ‘재인상’ 카드에 다시 삐걱거린다. 외환시장도 대미투자 발 불확실성에 여전히 불안하다. 한미협회 회장이기도 한 그에게 이 문제부터 물었다.
Q : 미국과의 관세 협상이 난항이다. 우리로선 허를 찔린 셈인데 대미 관계에서 우리가 여전히 순진한 구석이 있다고 생각하나.
A : “협상에는 상대방이 있다. 정해진 답이 있는 게 아니다. 게임이론에서 얘기하듯 의사결정 주체 간에 상호의존성이 있는 상황이다. 상대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상대가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느냐를 보고 그에 따라 대응해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과 미 행정부 핵심인사들 입장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건 11월 중간선거다. 결과에 따라 정치 지형과 트럼프 대통령의 운명이 결정된다. 그로선 당연히 선거에 내세울 치적을 원할 것이니, 한국·일본 등으로부터 받기로 한 투자 실적이 매우 중요하다. 선거에 써먹으려면 상반기 중에는 가시화해야 한다. 그러니 지금 마음이 급한 것이다. 그런데 국내에선 대미투자특별법이 국회에서 잠자고 있다. 그러니 트럼프 측은 투자를 실행할 의지가 없는 것 아니냐고 의심하고 나선 것이다. 지금이라도 상대가 뭘 원하고 어떻게 움직이는지 정확하게 봐야 한다.”
Q : 하지만 우리도 국내 입법 절차가 있지 않나. 국회 비준도 논란거리였는데.
A : “그건 사실 우리끼리의 얘기다. 미국 입장에선 압도적 다수인 여당이 야당의 반대에도 다른 법안들은 통과시키면서 왜 대미투자법만 여태 놔두고 있었느냐고 반문할 수 있지 않겠나. 대통령이 일단 재인상 카드를 꺼낸 상황이라 미국 관료들도 한국이 뭔가 구체적인 조치를 하기 전에는 움직이기 힘들다. 그러니 우선 대미투자법을 빨리 처리하는 게 상황 악화를 막는 길이다.”
※최 전 장관은 저서에서 게임이론을 이해하지 못하고 불확실한 상황을 낙관적 상황으로 고정하는 데서 전략적 실패가 비롯된다고 지적했다.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이 대표적이다. 국내 사례로 2024년 한미 방위비 분담협정을 든다. 미국 대선 기간 트럼프가 한국을 ‘머니 머신’이라 부르며 분담금을 크게 늘리겠다고 하자 당시 정부는 바이든 행정부와 서둘러 협정을 맺었다. 하지만 분담금 협정은 어느 일방이 재협상을 요구할 수 있는 행정협정이다. 트럼프가 당선 뒤 재협상을 요구할 게 뻔한 데 실리도 없이 미운털만 박히게 됐다는 게 그의 평가다.
연 200억 달러 조달 무리 없어
Q : 워싱턴에선 비관세장벽이나 쿠팡 이슈에 대한 불만도 흘러나온다. 상황이 틀어진 배경에 이런 것들도 작용했다고 보나.
A : “영향이 없다고 볼 수 없다. 지난해 국제투자협력대사로 미국 상공회의소를 찾았을 때도 온라인 플랫폼 규제 문제에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하더라. 쿠팡 건도 제재하더라도 감정을 빼고 굉장히 담백하게 해야 한다. 관계 당국이 무엇이 잘못됐는지 사실을 조곤조곤 따져 법에 따라 처분하면 된다. 국회가 기업 대표를 불러다 호통을 치고 망신주기식 쇼를 하는 건 괜한 역공의 빌미를 줄 뿐이다. 이런 이슈를 다룰 때는 감정을 컨트롤할 필요가 있다. 감정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하면 아무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으로 가고, 결국 양국 정부 모두에 부담이 되기 마련이다.”
Q : 전략적 대응과 상황 관리를 통해 우리가 추구해야 할 궁극적 목표는.
A : “미국이 주도하는 새로운 글로벌 공급망에서 한국 산업이 의미 있는 위치에 자리 잡는 것이다. 그래야 과거 50년처럼 향후 50년도 우리 경제가 순항할 수 있다. 이는 장기적인 목표이니 단기적 상황과는 약간의 괴리가 있을 수 있다. 또 한·미·일 삼각 협력과 한·중간 협력이 충돌하는 부분을 합리적으로 관리해야 한다는 어려운 과제도 잘 풀어나가야 한다.”
Q : 대미투자 문제에서 현실적인 난관은 환율이다. 정부가 속도를 높이는 게 능사가 아니란 시각도 있는데.
A : “연간 200억 달러의 투자 규모가 환율에 부담을 주는 수준이라고 보진 않는다. 외환보유액을 운용해 나오는 수입만 연간 100억 달러다. 여기에 해외에서 달러 채권을 발행할 수 있는 창구가 기존에도 세 군데 있다. 외국환평형기금, 산업은행, 수출입은행이다. 각각 30억 달러 정도는 무난하게 조달할 수 있다. 여기에 대미투자를 위한 특수목적회사(SPC)를 만들기로 하지 않았나. SPC까지 채권 발행을 하면 200억 달러를 만드는 건 크게 문제가 안 된다. 대미투자의 핵심 관건은 규모보다는 어디에 투자하는가다. 어느 정도 수익성이 있는 곳에 투자하고, 수익을 양국이 합리적으로 공유할 수 있다면 시장의 우려를 불식할 수 있다. 정부도 이런 부분에 초점을 맞춰 시장에 보다 명확한 메시지를 계속 낼 필요가 있다. 외환시장에 직접 부담을 주지 않을 것이고, 최대한 수익성 있는 곳에 투자할 테니 염려할 필요 없다고 정확하게 얘기를 해줘야 한다.”
최우선 산업정책은 규제 혁파
Q : 원화값이 달러당 1400원대 중반이 뉴노멀이 됐을 정도로 시장의 불안감이 여전한데.
A :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게 우리는 기본적으로 순채권국이고 무역수지 흑자국이다. 올해 대미 무역 흑자만 해도 800억 달러가 넘을 전망이다. 이런 통화가 붕괴할 리가 있겠나. 환율이 지금보다 크게 올라갈 요인도 보이지 않는다. 미국 증시가 가파른 상승은 멈춘 상태라 서학 개미의 해외투자 규모도 지난해보다 늘지는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환율을 볼 때는 우리 숫자만이 아니라 주변국 주요 통화의 움직임과 비교해 봐야 한다. 원화는 일본 엔화에 동조하는 경향이 강하다. 통상 10 대 1 정도인데, 현재 과도하게 벗어난 수준은 아니다. 지난번 베센트 미 재무장관이 구두 개입할 때 원화와 엔화에 대해 동시에 언급한 것도 그 때문이다.”
Q : 지난해 말 정부의 시장 개입이 적지 않았다. 앞으로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A : “한 번쯤은 경고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너무 잦으면 안 된다. 괜히 외환보유액만 축낼 수 있기 때문이다. 투기세력이 문제라면 정부가 몸을 던져 막아야 한다. 지금은 심리 관리가 더 중요하다. 또 환율이 물가에 영향을 줄 수 있는데, 저렴한 수입품 확대 등을 통해 대응할 필요가 있다. 외환보유액도 장기적으로 확충할 필요는 있어 보인다. 내가 국제금융국장을 하던 시절 전 세계에 떠다니는 유동 자금이 2조 달러 정도라고 했었다. 지금은 10배쯤 늘어난 20조 달러 정도 될 것이다. 하지만 외환보유액은 당시보다 두 배 수준으로 늘어난 정도다.”
Q : 전 세계가 산업정책의 시대로 회귀하고 있다. 우리는 어떻게 경쟁해야 하나.
A : “미국, 중국처럼 전략산업을 집중적으로 지원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한국에만 있는 규제부터 없애주는 게 우선이다. 한국은 이제 모든 면에서 선진국이다. 국내총생산·인구·군사력 등을 종합한 ‘국가 총 국력’이 6위라는 외신 평가도 있더라. 그런 선진국에서 왜 특화된 규제가 존재해야 하나. 노란봉투법 등이 대표적이다. 공정거래법도 경쟁 제한을 방지하는 건 좋다. 하지만 경제력 집중을 막는 규정은 한국에만 있는 규제다. 1984년 도입된 제도인데 당시는 사실상 폐쇄경제 시절이라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40년이 지나 개방되고 세계화된 경제에서 그런 제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게 외국인에겐 신기하게 보일 것이다. 보조금 주는 것보다 우선 이런 낡은 규제, 특히 한국에만 존재하는 규제를 없애는 게 출발점이라고 생각한다. 이게 안 되면 아무 소용없다. 다른 건 그다음 문제다.”
Q : 관료사회의 활력이 부쩍 떨어진 느낌이다. 현장에선 적극적으로 일하다 정권 바뀌면 찍힐까 우려가 크다.
A : “관료들에 어느 정도 권한을 준 뒤에 책임을 물었으면 좋겠다. 지금은 책임만 묻는 구조다. 이런 상황에서 행정 관료 제도가 제대로 작동할 수 있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