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심제 도입’이라는 평가를 받는 재판소원법(헌법재판소법 개정안)이 11일 더불어민주당 주도로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법사위) 전체회의를 통과했다. 민주당은 이날 대법관을 현행 14명에서 26명으로 증원하는 내용의 법원조직법 개정안과 재판소원법을 함께 법사위 전체회의에 상정했다.
재판소원법은 “법원의 재판을 제외하고는 헌법소원 심판을 청구할 수 있다”는 헌재법 68조에서 ‘법원의 재판을 제외한다’는 문구를 빼는 내용을 핵심으로 한다. 이 경우 대법원 확정판결도 헌재가 다시 판단할 수 있다. 민주당은 지난해 5월 이후 이른바 ‘사법 개혁’의 한 방편으로 이 법안을 발의했다.
사법부와 학계에서는 “소송 시간을 급격히 늘려 경제적 강자에게 유리한 법안”이라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또 민주당이 갑자기 4심제 도입을 꺼낸 배경에 대해 “호락호락하지 않은 사법부를 손보려는 심산”(재경지법 부장판사), “헌재의 권한을 기형적으로 확대해 대법원의 위상을 깎아내리겠다는 것”(고등부장 판사)이라는 반발이 나온다.
기우종 법원행정처 차장은 이날 비공개로 진행된 법안심사1소위에서 “헌법 101조는 주권자인 국민이 스스로를 위해 둔 장치”라며 “이를 허물겠다는 법안은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대법원을 넘어서서 재판을 거듭하는 건 대법원을 ‘최고 법원’으로 명시한 헌법 101조 위반이라는 취지다. 그는 또 “재판소원은 대법원까지 3심의 재판을 거친 패소 당사자에게 새로운 불복 기회를 부여하는 것”이라며 “당사자들은 시간과 비용을 들여 계속 다투어야 하고, 분쟁 해결을 통한 법적 안정성은 극히 저하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분쟁의 실질적 종결은 늦어지지만, 별 소용도 없는 고비용, 저효율, 비생산적인 제도”라고 강조했다. 이날 국민의힘은 법안 통과에 반대하며 법안심사1소위 표결에 불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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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 “재판소원 혜택, 권력자만 누리게 될 것”
국민의힘 법사위원들은 법안소위 직후 기자회견을 열고 재판소원법과 대법관 증원법 통과가 ‘날치기’라고 비판했다.
민주당 핵심 관계자는 “2월 임시국회 중에 사법개혁 3법(재판소원법·대법관 증원법·법 왜곡죄)을 통과시키는 게 목표”라며 “2월 마지막 주 본회의에서 연이어 처리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법원행정처는 전날 재판소원은 위헌 소지가 있다는 취지의 의견서를 법사위에 제출했다. 의견서에는 “재판소원의 혜택은 권력자 또는 높은 소송 비용을 지출할 경제적 능력이 있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고, 대부분의 사건은 사전심사 단계에서 무의미하고 허탈하게 종결될 가능성이 크다”는 지적이 담겼다.
또 “재판소원 도입 시 소송 비용만 과다하게 지출케 하는 희망 고문이 될 것”이라고 했다. 분쟁이 종결되는 시점만 늦출 뿐, 인용률은 지극히 낮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그러면서 재판소원 제도가 있는 독일에서 인용률이 매년 0%대에 그친다는 통계를 제시했다.
앞서 진보적 인사로 꼽히는 김선수 전 대법관은 법률신문 기고에서 “헌법재판소법만 개정해 재판소원 제도를 도입하는 것은 헌법 위반”이라며 “현행 헌법하에서 도입할 성질의 문제가 아니다”고 밝혔다. 지성우 성균관대 로스쿨 교수도 이날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전체 헌법의 체계를 바꾸는 문제이기 때문에 개헌해야 한다”고 했다.
헌재 기능의 과부하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장영수 고려대 로스쿨 명예교수는 “헌재의 사건이 몇 배는 폭증할 걸로 보인다”며 “헌재가 실제 작동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려면 헌법재판관 수를 늘려야 하는데, 이는 헌법 개정 사항”이라고 했다. 헌법 111조 2항은 헌법재판관 수를 9명으로 정해 뒀다. 헌재는 한 해에 약 3000건의 사건을 처리하는데, 1년에 약 4만건 접수되는 대법원 사건을 이어받아 처리하기는 힘들다는 지적이다. 지성우 교수 역시 “재판소원은 실질적 4심제 도입으로, 재판 하나가 종결되는 데 10년씩 걸릴 것”이라며 “승소 사례는 극히 드물 것이고, 돈 있는 사람이 헌재로 사건을 끌고 올라가면 돈 없는 사람은 끌려가야 한다”고 비판했다.
앞서 문형배 전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은 지난 12월 대법원 공청회에서 재판소원에 대해 “국민에게는 사건 처리 지연과 소송 비용 증가를, 헌재에는 업무 과부하를 초래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기우종 차장도 재판소원 허용이 약자에게 불리하다는 취지로 이날 법사위원들을 설득했다고 한다.
국민의힘 법사위원들은 법사위 전체회의에서 재판소원법 강행 처리에 강하게 반발했다. 이들은 노트북에 ‘4심제·대법관 증원=범죄자 대통령 재판 뒤집기’라는 문구를 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