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미수(米壽)의 황동규(88·이하 경칭 생략) 시인은 조금은 무심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윽고 낡은 가죽 가방에서 주섬주섬 A4용지 몇 장을 꺼냈다. 미리 보낸 건강 관련 질문에 대한 답변서였다. 인터뷰 날 아침에 노트북으로 하나하나 직접 타자를 쳐 출력해 온 것이었다.
고백하건대 〈100세의 행복〉 주인공을 만나기 전 이렇게까지 초조했던 적은 없었다. 지고지순한 시인에게 지극히 세속적인 건강 비결을 캐물어도 될까 걱정했다. 게다가
상대는 소설 ‘소나기’를 쓴 황순원의 아들이자, 고3 때 국민 연애시 ‘즐거운 편지’를 써낸 천재 시인 아닌가.
그럼에도 발길을 재촉한 건, 고도의 집중력을 요하는 문학 근육을 평생 단련한 그는 ‘건강한 노년’의 상징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2024년에도 시집 『봄비를 맞다』를 냈다. 젊은 시절보다 오히려 밀고 나가는 힘이 더 좋다는 평가까지 따라붙었다.
건강 비결 답변서를 보며 깨달았다. 기자의 오만과 편견이었음을. 종이에는 고고한 시사(詩辭) 대신,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법한 보통의 언어로 가득했다.
등 뒤로 숨겨온 위스키, 잘 먹는 법
" 잠깐 기다릴래요? 집에서 ‘보약’ 좀 가져오게. "
서울 동작구 사당3동 그의 자택 앞 카페에서 ‘덜 달게’ 만든 핫초코를 호로록 마시던 그가 벌떡 일어섰다. 집 공개는 극구 사양했던 그가 굳이 집에서 갖고 나와서라도 꼭 보여주겠다는 게 무엇인지 귀가 솔깃했다.
집에서 나온 그가 가져온 건 40도짜리 잭 다니엘 위스키 한 병이었다.
쇼핑백도, 포장도 없이 위스키병을 등 뒤로 감춘 모습은 영락없이 가장 좋아하는 물건을 가진 소년 같았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마신다는 ‘약주’였다.
(계속)
“술이냐, 담배냐” 44세에 내린 결단
" 술 끊을래요? 담배 끊을래요? 뭐든지 하나 끊기 전에는 오지 마세요. "
황동규에게 고혈압 진단을 내린 의사가 물었다. 그의 나이 44세였다. 일주일에 다섯 번은 마시는 술을 끊는 일이란 상상만 해도 막막했다. 그래서
그날로 하루에 2갑씩 피우던 담배를 단번에 끊었다.
" 아직 살아 있는 고교 동창 중에 지금 나처럼 술 마실 수 있는 사람이 10%도 안 돼요. 담배를 그때 끊은 게 잘한 일이지요. "
에필로그: 수줍은 미소가 아름다운 시인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시인의 날카로운 감각보다 그가 남긴 은은한 미소가 마음속에 더 깊이 남았습니다. 아흔을 목전에 둔 거장의 얼굴에서 그토록 맑고 수줍은 모습을 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단골 돼지갈비 식당에서 위스키 한 잔. 한나절에 걸친 인터뷰에도 지친 기색 없이 조곤조곤 말을 이어나가는 그를 보며 강력한 활력의 징후가 보였습니다. 노년의 활력은 요란하지 않았습니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자신만의 리듬을 지키며, 여전히 한 줄의 시를 위해 노트북을 여는 그 성실한 호기심이 시인을 늙지 않게 하고 있었습니다.
" 진짜 내 이야기를 한 인터뷰는 처음이었어요. 정말 좋은 대화였어. 잊지 않을게요. "
헤어질 무렵 그가 건넨 수줍은 고백에 괜히 마음이 먹먹해졌습니다. 한국 문학의 전설을 만난다고 조금 떨렸는데, 헤어질 때 보니 그저 삶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돌아온 기분이었습니다.
위스키를 매일 마시고도 건강할 수 있는 비결부터 아버지 황순원 소설가의 거대한 그림자를 딛고 오직 자신의 호흡으로 걸어온 시간까지. 작품 밖에서 처음 만난 문학계의 거장 황동규, 그리고 인간 황동규의 드문 고백을 〈100세의 행복2〉에서 확인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