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휘자 존 엘리엇 가디너(83)는 미소를 띠고 화면에 나타났다. 그의 뒤 넓은 창문 밖으로 초록색 숲이 멀리 펼쳐져 있었다. 창의 한쪽 옆에는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의 초상화가 걸렸다.
“지금 계시는 농장이 650에이커(263만㎡, 79만평)라고 들었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큰가요?” 노 지휘자의 미소가 짙어졌다. “지금은 면적이 좀 줄어들었어요. 양도 750마리로 예전보다 적어졌고요. 멋있는 프랑스 산 소 170마리도 함께 해요.”
10일 화상 인터뷰에서 가디너는 “음악과 땅의 관계, 또 자연ㆍ인간ㆍ예술의 연결성에 대해 탐구하고 있다”고 했다. 농부의 아들인 그가 고향인 영국의 시골 마을인 도싯의 스프링헤드로 돌아간 이유다.
가디너는 1960년대부터 음악계의 수퍼스타였다.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역사, 중세 스페인어, 아라비아어를 전공하던 1964년에 몬테베르디 합창단을 창단해 17세기 음악의 해석에 신선한 충격을 던졌다. 이어 잉글리시 바로크 솔로이스츠, 혁명과 낭만 오케스트라를 만들고 지휘했다. 바흐ㆍ모차르트 뿐 아니라 베토벤ㆍ베를리오즈까지 다루는 범위를 넓히며 내놓는 음반마다 화제가 됐다.
특히 바흐의 권위 있는 해석가이며, 1999년부터 바흐의 교회 칸타타 198곡 전곡을 공연하고 녹음해 음반상을 거듭 받았다. 2번의 그래미, 12번의 그라모폰 수상자다.
한 시대를 이끌었던 그가 지금은 농장과 숲에 빠져있다. 가디너는 2024년 8월 새로운 합창단과 오케스트라인 컨스텔레이션(Constellation)을 만들었다. 스프링헤드 지역에 근거를 둔 예술 프로젝트의 일환이다. 가디너는 “콘크리트로 지어진 공연장에서 연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음악과 자연의 가치를 아우르려 한다”고 했다.
60년 동안 이끌었던 몬테베르디 합창단과 오케스트라를 떠난 것은 2024년 7월. 프랑스의 한 공연에서 함께 공연했던 가수를 폭행했다는 혐의 때문이다. 가디너는 곧 사과문을 발표하고 이어지는 공연을 취소한 뒤 예술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시골 마을로 돌아와 컨스텔레이션 오케스트라ㆍ합창단을 조직했을 때 몬테베르디 오케스트라의 악장인 카티 데브레츠니 등이 이적해 합류했다.
논란을 겪은 후 그의 관심은 보다 근본적인 데에 있다. 그는 지난해 10월 스프링헤드 농장에서 열었던 심포지움을 소개했다. “음악가, 생태학자, 농부가 한자리에 모였다. 음악과 땅의 관계에 대해 탐구했고 물ㆍ공기 같은 요소가 어떻게 음악에 스며있는지 토론했다.” 가디너는 유기농 농부이자 산림 관리인이었던 아버지, 성악가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자연과 음악을 탐구하며 자랐다. “정원과 숲속에서 노래하며 성장할 때 알았다. 모든 것은 연결돼 있었다.”
별자리, 또는 성좌라는 뜻을 가진 컨스텔레이션(Constellation)이라는 단어가 가디너의 최근 화두다. “이 단어는 연결을 상징한다. 오케스트라 안에서도 음악가들은 서로 연결돼 협업한다. 음악을 중심으로 관계의 구조를 만들고, 음악에 대한 사랑을 한데 모아 관객에게 전달하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다.” 그는 “이렇게 마음을 모아 연주할 때 듣는 사람에게 희망과 위안을 주리라 확신한다”고 덧붙였다.
가디너는 컨스텔레이션 합창단ㆍ오케스트라와 함께 다음 달 한국에서 공연한다. 첫날에는 바흐의 B단조 미사, 둘째 날에는 모차르트의 레퀴엠과 C단조 미사를 들려준다. 그는 1996년과 2004년 내한했고, 첫 한국 공연의 연주곡은 바흐의 B단조 미사였다. 꼭 30년 만에 같은 곡을 연주한다. “30년 전 서울이 정확히 기억난다. 공연을 마치고 엘리베이터에 탄 두 명의 한국 청중이 ‘하늘에서 천사를 내려줘 고맙다’고 인사했던 것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그는 이번 공연의 핵심이 ‘미완성’이라고 했다. 가디너가 보는 바흐는 위대한 작곡가인 동시에 지극히 인간적이다. “B단조 미사의 한 순간에 음악이 완전히 멈추고 무너져 내린다. 자신의 믿음을 의심하는 순간이다. 그러다 갑자기 그 반대편으로 나아가 확신의 햇살과 같은 음악을 시작한다. 이처럼 의심하는 작곡가에게 인간적으로 깊이 공감한다.”
가디너의 방 한쪽에는 바흐의 유명한 초상화가 걸려있다. 엘리아스 고틀로브 하우스만이 그린 1748년작 초상화는 2차 세계대전 시기부터 가디너의 스프링헤드 집에 걸렸고, 2015년 라이프치히의 바흐 아카이브로 돌아가 현재 그림은 복사본이다. 가디너는 “이 그림이 집의 층계참에 걸려있어, 나는 바흐의 시선 아래 성장했다”며 “어려서 장엄하게 보였던 작곡가의 모습이 점점 인간적으로 다가왔다”고 했다.
또한 모차르트가 끝까지 작곡하지 못한 두 곡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레퀴엠은 죽음으로 미완이 됐지만, C단조 미사곡은 일부러 완성하지 않았다. 신앙과 계몽주의 사이의 균형을 찾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갈등과 미완성이 감동으로 다가온다.”
그는 여전히 학구적이고 정교한 해석을 하는 음악가다. 2013년 바흐에 관한 1000페이지(한국어 기준)짜리 책을 냈던 그는 작곡가 몬테베르디에 관한 책을 쓰고 있다. “매일 아침 농장에서 개를 산책시키고 요가를 한 후 책상에 앉아 책을 쓴다”는 그는 이번 책의 가제가 ‘몬테 베르디와 그의 성좌’라고 했다. “1580~1640년에 쏟아진 천재들, 즉 갈릴레오, 케플러, 셰익스피어, 카라바조, 루벤스, 그리고 몬테베르디의 활동과 연결에 대해 쓰고 있다.” 그는 “이번 책도 꽤나 두꺼울 것”이라고 했다. 공연은 다음 달 3·4일 오후 7시 30분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