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가 인공지능(AI) 반도체의 핵심 부품인 6세대 고대역폭메모리(HBM4)를 세계 최초로 양산 출하했다. 직전 세대 HBM 경쟁에서 SK하이닉스에 주도권을 내줬던 삼성전자가 차세대 제품에선 속도를 앞세워 반격에 나섰다.
삼성전자는 12일 업계 최고 성능의 HBM4를 출하했다고 밝혔다. 당초 설 연휴 직후로 예정됐던 일정을 고객사와 협의를 거쳐 약 1주일 앞당겼다. 업계에선 “삼성전자가 HBM3E(5세대)에서 SK하이닉스에 밀렸던 흐름을 HBM4에서 되돌리겠다는 의지를 반영한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삼성전자의 이번 HBM4는 국제반도체표준협의기구(JEDEC) 표준(8Gbps)을 약 46% 웃도는 11.7Gbps(초당 기가비트)의 동작 속도를 구현했다. 전작 HBM3E(9.6Gbps) 대비 약 1.22배 빠른 수준이다. 삼성은 최대 13Gbps까지 구현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AI 모델이 대형화할수록 심화하는 데이터 병목을 해소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단일 스택(묶음) 기준 메모리 대역폭은 최대 3.3TB/s(초당 테라바이트)로, 전작대비 약 2.7배 향상됐다. 고객 요구 수준(3.0TB/s)을 상회한다.
기술적 차별화의 핵심은 공정이다. 삼성전자는 10나노급 6세대(1c) D램을 선제적으로 도입했고, HBM의 두뇌격인 베이스다이(base die)에는 파운드리 4나노 공정을 적용했다. 메모리와 파운드리를 모두 하는 삼성의 사업구조를 활용했다. 그 결과 에너지 효율은 전 세대보다 약 40% 개선됐고, 열 저항과 방열 특성도 각각 약 10%, 30% 향상됐다는 설명이다.
황상준 삼성전자 메모리개발담당 부사장은 “기존에 검증된 공정을 적용하던 전례를 깨고 1c D램과 파운드리 4나노 등 최선단 공정을 적용해 고객의 성능 상향 요구에 적기에 대응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삼성전자는 차세대 제품 로드맵도 구체화했다. 2026년 하반기 HBM4E(7세대) 샘플을 출하할 계획이며, 2027년부터는 고객 맞춤형 HBM도 순차적으로 샘플링한다. AI 가속기와 그래픽처리장치(GPU) 아키텍처에 맞춰 용량·속도·전력 특성·인터페이스를 개별 설계해 성능 효율을 극대화하겠다는 전략이다. 업계에서는 AI 반도체가 고객 맞춤형 구조로 진화하는 흐름을 감안할 때 커스텀 HBM의 비중이 점차 확대될 것으로 본다.
삼성전자는 HBM4 양산을 계기로 올해 HBM 매출이 전년대비 3배 이상 늘어날 것으로 전망했다. 이에 맞춰 생산 능력 확대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2028년 본격 가동될 평택사업장 2단지 5라인을 HBM 중심 생산거점으로 삼아, 중장기 수요 확대 국면에서 안정적인 공급 역량을 확보한다는 전략이다.
송재혁 삼성전자 디바이스솔루션(DS)부문 최고기술책임자(CTO·사장)는 전날 열린 ‘세미콘코리아 2026’에서 “HBM4는 기술에 있어서는 최고다. 고객사 반응도 매우 만족스럽다”며 “차세대 HBM4E, HBM5에서도 업계 1위가 될 수 있도록 기술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용석 가천대 반도체대학 석좌교수는 “삼성전자가 ‘세계 최초’란 표현을 전면에 내세운 건 상당히 이례적”이라며 “HBM 시장에서 실기한 것에 대한 위기의식이 그만큼 컸다는 방증”이라고 분석했다. 이어 “더 이상 뒤처지지 않겠다는 각오로, HBM4는 물론 이후 AI메모리 시장까지 주도하겠다는 강한 메시지를 던진 것”이라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