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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혜수의 뉴스터치] 불모지

중앙일보

2026.02.12 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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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혜수 선임기자
드라마 ‘하얀 거탑’의 원작 소설가 야마사키 도요코의 또 다른 대표작이 『불모지대』다. 극우 미화 논란이 있지만, 한국에서도 정치인·관료·기업인 등이 열독했다. 일본군 주인공 이키 다다시는 시베리아에서 포로생활을 마치고 귀국한다. 상사맨으로 변신한 그는 무역 전쟁의 전장을 누빈다. 이토추 상사 입사 20년 만에 회장까지 오른 세지마 류조가 이키의 실존 모델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 등과 가까웠던 세지마는 1965년 수교 등 한·일 외교 막후에서 활약했다.

세지마는 서울과 일본 나고야가 맞붙은 1988 하계올림픽 유치전 당시 한국을 위해 물밑에서 뛰었다. 스포츠 외교 불모지였던 한국은 이를 계기로 국제무대에 데뷔했다. 그 30년 뒤 평창에서 2018 동계올림픽도 열었다. 서울 대회 이래 대부분의 하계올림픽에서 한국은 메달 순위 톱10에 들었다. 동계는 그렇지 못했다. 메달이 빙상 종목에 쏠린 탓이다. 입상은커녕 출전조차 언감생심이던 시절, 세상은 설상 종목을 “불모지”라고 불렀다.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 첫 주, 설상 종목 스노보드가 메달 레이스를 이끌었다. 37살 아저씨 김상겸이 평행대회전(PGS) 은메달로 문을 열었다. 18살 여고생 유승은이 빅에어 동메달로 뒤를 이었다. 그간 한국의 동계올림픽 첫 메달은 늘 스피드 또는 쇼트트랙 스케이팅 등 빙상 종목에서 나왔다. 설상 종목은 8년 전 평창에서야 이상호의 스노보드 PGS 은메달로 첫 씨앗을 뿌렸다.

『삼국지』 속 제갈량은 위나라 정벌에 앞서 올린 ‘출사표’에 “5월에 노수를 건너 불모(지) 깊숙이 들어갔다(五月渡瀘 深入不毛)”고 썼다. 앞선 남만 원정을 되새기는 대목이다. 뒤집어 보면 천하의 제갈량에게도 불모지를 가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한국 설상 종목은 ‘불모지’라는 비하 속에서도 묵묵히 갈고 일궈 메달의 싹을 틔웠다. 그들에게 갈채를 보낸다.





장혜수([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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