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 수장고에는 1970년대 초부터 수집한 작품이 2만 점 가까이 있다. 그중에는 적기에 잘 샀다고 무릎을 치게 되는 작품들이 있는데, 1987년에 구입한 앤디 워홀의 ‘자화상’ 세트가 대표적이다.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미술관 소장품을 좀 더 국제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리자는 취지에서 야심 차게 구입한 작품으로 신문에도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워홀이 58세의 나이로 급작스럽게 사망한 지 1년 정도 지난 시점이었다.
내면 알 수 없는 표정, 오히려 매력적
백남준 덕에 싸게 구입 후 가격 올라
상업미술 스타, 순수미술이 내치자
대량생산으로 순수 미학 전복 꾀해
매체 노출 즐겼지만 속내 안 드러내
신비주의 전략, 성공적으로 수행
당시 기사에 따르면, 미술관은 이 두 작품을 1점당 약 2500만원에 구입했다. 이 작품을 구입할 때는 백남준이 다리를 놓아 당초 제시된 가격보다 40%나 저렴하게 구할 수 있도록 흥정을 도왔다는 후문이다.
생전 작품가, 바스키아보다 낮아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2010년에는 동일한 시리즈의 (그러나 사이즈가 더 큰) 보라색 작품이 경매에서 400억원에 낙찰되었다. 디자이너 톰 포드의 소장품이었다. 사실 앤디 워홀은 생전에 소위 ‘셀럽’으로서 엄청난 명성을 누렸지만 작품 가격은 그다지 높지 않았다. 한때 그와 협업했던, 그러나 나이는 서른네 살이나 어린 장 미셸 바스키아보다 작품가가 낮았으니 말이다.
그런데 사망 이후에 평가도 달라지고 작품 가격도 지속적으로 올랐다. 2022년에는 메릴린 먼로의 초상화가 약 2000억원에 판매되면서 미국 화가 중 가장 높은 경매 기록을 세웠다.
워홀이 생전에 명성에 비해 작품가가 높지 않았던 이유는 상업미술가로 시작한 이력, 지나치게 두드러진 사업가적 면모, 그리고 괴짜 연예인 같은 행보 때문에 진지한 예술가로 인정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워홀은 팝아트의 기수가 되기 전, 패션계에서 가장 잘나가는 그래픽 디자이너였다. 1928년 피츠버그의 체코계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아홉 살 때부터 드로잉에 재능을 보여 고향의 기술학교에서 상업미술을 전공했다. 그리고 스무 살에 뉴욕으로 가자마자 독특한 구두 드로잉으로 패션계를 사로잡으며 빠르게 성공을 이루었다.
1950년대는 사진이 패션 잡지의 화보로 사용되기 전. 독특하고 아름다운 그의 그림들은 보그·뉴욕타임스에 정기적으로 실렸고 음반 표지나 명품 브랜드의 광고로까지 확대됐다. 스물넷에 이미 드로잉만으로 개인전을 열었고 서른 무렵에는 뉴욕에서 가장 성공한 그래픽 디자이너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순수미술에 대한 열망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특히 이탈리아 여행에서 르네상스 대가들의 작품을 본 것이 여기에 불을 지폈다. 그는 미술계에 진입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다. 추상표현주의 양식을 시도하기도 하고 인맥 관리에도 힘을 썼지만 벽은 높았다. 상업미술로 너무 성공한 것이 오히려 걸림돌이 되었다.
“수장고 공간 없다” 기증 퇴짜 맞아 뉴욕 현대미술관에 드로잉을 기증하려다 거절당한 일화는 양쪽 모두에게 웃지 못할 일화로 남아 있다. 알프레드 바 관장이 쓴 ‘귀하의 기증 신청은 감사하지만 수장고에 적절한 공간이 없어 반려한다’는 내용의 편지는 두고두고 회자되었다.(이 미술관은 오늘날 워홀의 최대 소장처 중 하나로 워홀 사후 2년 만에 대규모 회고전을 열었다.)
당시 워홀은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새로운 전략을 택했다. 상업미술가로서 쌓아 올린 명성은 명품을 아름답고 독창적인 방식으로 직접 그린 실력 덕분이었다. 그는 방향을 반대로 틀어 대중문화의 이미지들을 전혀 독창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재현하기 시작했다. 캠벨 수프와 코카콜라, 메릴린 먼로와 엘비스 프레슬리. 일상생활과 대중 매체에서 소비되는 이미지들을 소재로 삼았다.
처음에는 손으로 그렸지만 점차 실크스크린이라는 판화 기법으로 옮겨갔다. 이 방식으로는 같은 이미지를 여러 장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야말로 대중문화를 대량 생산으로, 기계적으로 다루는 작업이었다. 조수들을 고용하여 작업량을 늘리고 커다란 작업실에는 ‘공장’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순수미술이 내세우는 가치, ‘독창성과 유일성’을 완전히 뒤집은 전략이었다.
작가의 해석과 손길을 최소화하여 일상의 물건을 그대로 재현한 워홀의 작품들은 결국 팝아트의 대명사가 되었다. 예술가의 내면이 전혀 반영되지 않은 기계적 재현 방식은 감정 표출이 적은 그의 성격, 그리고 사업가적 기질과도 잘 맞았다. 그는 미술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팝아트의 교황(pope of pop)”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자화상은 앤디 워홀 예술의 정수를 담고 있는 작품이다. 워홀은 예술가의 이미지가 곧 예술이 된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가장 강력한 사례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마치 전기에 감전된 듯 은빛 머리칼이 삐죽삐죽 서 있는 모습 때문에 ‘깜짝 가발(fright wig)’이라는 애칭으로도 유명하다. 죽기 전 마지막 자화상이라는 점이 아우라를 더한다. 까만 배경 속에서 공허한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워홀의 얼굴은 그의 예술과 인생을 동시에 대표하는 이미지가 되었다.
이 자화상의 가치와 관련한 흥미로운 이야기로 『앤디 워홀 손안에 넣기(I bought Andy Warhol)』, 그리고 후속작 『나는 앤디 워홀을 너무 빨리 팔았다(I sold Andy Warhol (too soon))』, 두 권의 책이 있다. 필자인 리처드 폴스키는 워홀 생전부터 활동해온 갤러리스트로 워홀 예술의 본질을 가장 잘 표현한 작품을 강박적으로 찾아다닌 12년의 여정 끝에 이 작품을 발견해 구입했다. 폴스키의 작품은 미술관 소장품보다는 크기가 작은 30×30㎝짜리 녹색 버전. 그는 1988년에 이 작품을 4만7500달러에 구입한 후 2005년에 37만5000달러에 판매했으나, 그로부터 2년 뒤 260만 달러에 거래가 되는 것을 보고 엄청난 후회에 휩싸인다.
폴스키의 집착과 회환의 대상이 된 이 자화상은 앤디 워홀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해준다. 워홀은 평생 자신의 외모에 강박적으로 집착했다. 자서전적 에세이에는 어려서 ‘빨간 코 앤디’로 놀림을 받은 일이며 지나치게 하얀 피부색 등에 대해 구구절절 토로했다. 외모에 어느 정도로 신경썼는지 보여주는 재미있는 구절도 있다.
“안색이 원래부터 창백하다면 볼 터치를 더 많이 해야 한다. 코가 크다면 그것을 강조하고, 뾰루지가 났다면 그것이 두드러져 보이게 크림을 발라라-‘나 뾰루지 크림 발랐어!’라고 말하는 듯이. 그러면 그게 원래부터 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것이다.”
그가 항상 “이건 가발이야!”라고 외치는 듯한 특이한 가발을 쓴 것이 이해되는 대목이다.
탈모가발 벗겨질까 봐 평생 노심초사 워홀은 20대부터 탈모가 심해 평생 가발을 썼는데 혹시라도 벗겨질까 봐 노심초사했다. 한 번은 사인회에서 어떤 여성이 기습적으로 가발을 벗겨서 소동이 벌어진 적이 있었는데, 평상시에 감정을 거의 드러내지 않은 워홀은 그날의 일기에 그 여자를 발코니 너머로 밀어버리지 않은 것이 후회된다고 남겼다.
그렇다면 워홀은 이 ‘깜짝 가발’ 자화상에 만족했을까? 그렇지 않다. 이 시리즈는 애초에 앤서니 도페라는 영국 갤러리스트의 아이디어였다. 도페는 1985년의 어느 날 요제프 보이스와 식사를 하다가 워홀이 만든 보이스의 초상 작품을 보고 신박한 생각을 떠올렸다. 도페가 보기에 워홀은 당대 최고의 초상화가였다. 그런데 한동안 초상작업을 하지 않았으니, 작가 자신을 소재로 한 초상화를 제작하여 전시하겠다는 구상이었다. 워홀 예술의 핵심은 바로 워홀이라는 인물 그 자체임을 간파하여 작가가 곧 주제인 전시를 열기로 한 것이다.
워홀은 도페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작업을 위해 폴라로이드로 자신의 얼굴을 여러 컷 찍어서 보여주었다. 그러나 도페가 고른 이미지는 워홀이 원한 이미지와 달랐던 모양이다.
워홀은 도페가 기억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고 자신이 원하는 이미지로 캔버스 작업을 시작했다. 그런데 몇 주 뒤, 도페는 스튜디오로 찾아와서 진행 중인 작업을 보더니 “우리가 합의한 그 사진으로 다시 그려 달라”고 주문했다. 워홀은 군말 없이 갤러리스트의 말에 따랐고, 전시는 대성공이었다. 당시 가디언에서는 ‘60년대를 대표하는 가장 신비로운 얼굴’이라며 텅 빈 듯한 표정, 어린아이 같은 순진함, 완벽한 괴짜다움, 무심함과 신비로움이 제대로 드러난 작품이라는 평을 남겼다.
도페가 선택한 이 얼굴은 워홀이라는 예술가의 핵심을 담고 있다. 워홀은 종종 스스로를 거울에 비유하곤 했다. 작품의 의미나 철학을 묻는 질문에 “작품의 표면을 봐라. 그게 나다. 그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답했다. 거울이 오직 앞에 있는 사물만을 투영하듯 그의 예술도 대중이 소비하고 욕망하는 이미지를 그대로 반영할 뿐이었다.
이는 삶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워홀은 꽤나 솔직해 보이는 방대한 기록과 일기를 남겼다. 그럼에도 수줍음이 많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태도, 무심하고 일관성 없는 말들 때문에 그가 진짜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주변에서도 알기 힘들어했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을 대중매체에 노출시켰지만 그 누구도 진짜 속마음과 의도를 알 수 없게끔 행동함으로써 신비주의 전략을 가장 성공적으로 수행한 셀럽이기도 했다. 그런데 예술에 있어서, 그리고 인간에 대해서 ‘알 수 없다’는 감정만큼 매력적인 요소도 드물다. 워홀과 그의 작품을 둘러싼 신화는 아무래도 계속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