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통령과 정청래 더불어민주당 대표,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의 12일 청와대 오찬 회동이 행사 시작 1시간 전에 전격 무산됐다. 대통령과 여야 대표가 설 연휴를 앞두고 밥상머리에 마주앉아 민생을 논하는 것조차 쉽사리 허락되지 않는 한국 정치의 무거운 현실이 여실히 드러난 셈이다.
장 대표는 이날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아무리 봐도 오늘(12일) 오찬은 이 대통령과 정 대표 두 분이서 하는 게 맞는 것 같다”며 “한 손으로 등 뒤에 칼을 숨기고 한 손으로 악수를 청하는 것에 대해 응할 수 없다”고 밝혔다. 장 대표는 민주당이 전날 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대법관 증원법’과 ‘재판소원법’을 강행 처리한 걸 불참 이유로 꼽았다.
대법관 증원법은 현행 14명의 대법관을 26명으로 늘리는 게 핵심이고, 재판소원법은 대법원 확정 판결에 대해 헌법소원 청구를 허용하는 내용이다. 국민의힘은 그간 “대법관 증원과 사실상의 4심제인 재판소원 도입은 이 대통령의 사법 리스크를 방탄하려는 의도”라고 반대해 왔다.
장 대표는 “대통령과 오찬이 잡히면 반드시 그 전날에 무도한 일들이 겹친다”며 “이번 오찬 회동이 잡힌 다음에 이런 악법을 통과시킨 정 대표는 진정 이 대통령의 엑스맨인가”라고 따졌다. 그러면서 “민생을 논하자고 하면서 모래알로 지은 밥을 씹어 먹으러 청와대에 갈 수는 없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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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숨기고 악수” “예의없다, 노답”…뒤엎어진 협치밥상
이날 오찬 회동은 장 대표가 영수회담을 요구한 데 대해 청와대가 전날 여·야·정 회동 형식으로 수용하며 전격 성사됐다. 이 때문에 장 대표도 참석할 계획이었다. 실제 장 대표는 이날 최고위원회의에서 “국민 목소리를 충실히 전달하고 대안과 비전도 제시하겠다”는 포부도 밝혔다.
그러나 이어 발언에 나선 최고위원들이 잇따라 불참을 요구하며 분위기가 바뀌었다. “연출극에 가서 들러리 서서는 결코 안 된다”는 신동욱 최고위원의 발언을 시작으로 “막장 법안을 통과시킨 것을 유야무야 넘기기 위해 회동하는 것”(김민수), “계산된 청와대의 오찬”(양향자) 등 불참 요구가 쏟아졌다.
그러자 장 대표도 “지도부와 함께 다시 논의하고 결정하도록 하겠다”며 “(야당) 대표와 대통령이 악수하는 사진으로 대한민국의 사법 시스템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덮으려 할 것”이라고 발언 수위를 확 높였다. “부부싸움 하고 둘이 화해하겠다고 옆집 아저씨 불러놓는 꼴”이라고 꼬집기도 했다.
최고위 직후 지도부와 비공개 회의를 연 장 대표는 “민생 현안은 대통령과 논의가 필요하다”는 입장이었지만 나머지는 “들러리를 설 수 없다”며 반대했다고 한다. 50여 분 논의 끝에 장 대표는 불참을 수용했고, 박준태 대표 비서실장은 오전 11시 직전에 홍익표 청와대 정무수석에게 “불참하겠다”고 연락했다. 지난해 9월 8일 이후 157일 만의 오찬 회동이 무산된 순간이었다.
국민의힘에선 회동 불참을 놓고 설전도 벌어졌다. 소장파인 김용태 의원이 오후에 열린 의원총회에서 “이 대통령 면전에서 ‘정치 그렇게 하지 마시라’고 식탁이라도 엎고 나오든가 했어야 한다”고 하자 장 대표는 “회동을 앞두고도 민주당이 법안을 단독으로 의결해 버린 건 우리를 가지고 논 것”이라고 반박했다.
민주당은 격앙된 반응을 쏟아냈다. 정청래 대표는 페이스북에 “국민과 대통령에 대한 예의는 눈곱만큼도 없는 국민의힘의 작태에 경악한다. 국힘, 정말 노답이다”고 썼다. 대표 비서실장인 한민수 의원도 페이스북에 “영수회담마저 정치 공세 수단으로 여기는 국힘당을 국정의 파트너라 할 수 있겠는가”라고 적었다. 친명계 의원은 “장 대표가 오찬을 통해 대통령과 대화로 풀게 있었고 또 본인이 원하지 않았느냐”며 “설 전이라 타이밍도 안 좋고, 큰 실수를 한 것”이라고 했다.
박수현 수석대변인은 “민족의 명절 설을 맞아 모처럼 국민께 희망과 행복을 드릴 수 있는 기회가 무산된 것에 대해 유감을 표한다”며 “더구나 장 대표가 먼저 요청했고, 시간이 임박해 일방적으로 취소한 것은 국민과 대통령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고 강조했다.
전날 회동을 제안했던 청와대도 불쾌감을 드러냈다. 홍 수석은 브리핑에서 “이번 회동은 국정 현안에 대한 소통과 협치를 위한 자리였다”며 “국회 상황과 연계해 대통령과 약속된 일정을 취소한 점은 유감”이라고 했다. 청와대는 이날 이 대통령과 정 대표의 별도 오찬은 진행하지 않았다. 홍 수석은 “회동 취지는 제1 야당과 여당 대표를 모시고 국정 전반을 논의하자는 자리였다. (장 대표가 빠진 채) 자리를 갖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다”고 했다. 이 대통령은 회동 취소에 대해 별다른 말이 없었다고 청와대 관계자는 전했다.
조원빈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극단의 정치 현실 속에서 회담이 무산됐다”며 “야당을 초대해 놓고 뺨 때리는 여권이나 대안 없이 반대만 하는 야당이나 안타깝기는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