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헌법 3조는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부속 도서'라고 규정하고 있어요. 그러니 대한민국 공무원인 제가 선화씨를 보호하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
류승완 감독의 새 영화 '휴민트'에서 국정원 요원 조과장(조인성)은블라디보스톡 북한 식당에서 일하는 북한 접객원 선화(신세경)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한국 헌법학자들의 골머리를 아프게 해왔던 문제의 헌법 3조. '북한 동포도 우리 국민'이라는 대사가 2026년에도 유효한 것일까요?
우선 간단한 줄거리. 조과장은 작전 과정에서 자신이 접촉해 오던 탈북 여성 휴민트를 잃고 한동안 트라우마에 시달립니다. 단서를 쫓아 블라디보스톡으로 향한 조과장은식당에서 만난 선화를 새로운 휴민트 후보로 삼고 접근하죠. 한편 북한 보위성 조장 박건(박정민)은 국경지대에서 이어지는 범죄 조사를 위해 블라디보스톡을 방문하고, 총영사 황치성(박해준)에게 비밀이 있다는 의심을 갖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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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북한 말에는 자막이 붙네?
북한이 소재로 등장하는 영화는 계속 기획되지만 소비자는 빠르게 변해갑니다. 2025년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통일이 필요하다'는 의견은 43%에 그친 데 비해 '평화적 공존이 가능하다면 통일은 필요 없다'가 58%를 차지했습니다. 심지어 '통일 비용 부담 의사가 있다'는 25%에 그칩니다.
'휴민트'는 이런 인식의 변화를 민감하게 반영합니다. 이 영화의 전편 격인 '베를린'(2013) 때까지만 해도 류승완 감독은 련정희(전지현)의 죽음을 통해 분단 환경의 냉엄함을 그려내려 했지만 '모가디슈'(2021)의 남북한 공관원들이 힘을 합쳐 탈출하는 장면에선 '뜨거운 동포애'는 살짝 배제됩니다. 세상이 변한 거죠. '휴민트'에선 '동포'라는 말이 아예 등장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북한 사람들이 사용하는 사투리에는 아예 자막을 붙입니다. 놀랍게도 요즘 젊은 관객들 중에는 북한 사투리를 "잘 못 알아듣겠다"는 반응이 적지 않다는군요. 뻔히 귀로 들어도 잘 들리는데 자막이 붙어 나오는 '북한어'를 보고 있으면 묘한 느낌이 듭니다. 브레히트의 소격효과(Defamilarization), 즉 낯설게 하기를 감안하면 이 사람들은 '동포'가 아닌 '외국인'이라는 선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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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보스톡, '조 윅'을 위한 공간
그렇다면 왜 굳이 블라디보스톡일까요. 전편 격인 '베를린' 마지막 장면에서 표종성(하정우)이 향한 곳이 블라디보스톡이기도 하지만, 조금 생각해보면 선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동안 한국 액션 영화의 역사에서 총기 사용은 금단의 열매였죠. 한국은 총기의 보유와 반입이 엄격하게 금지된 나라고, 몇몇 예외가 있긴 하지만, '한국식 액션'이란 맨손으로 하는 마동석의 핵펀치를 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휴민트〉는 마침내 그런 아쉬움을 깔끔히 날려 버립니다.
현실의 블라디보스톡이 어떤 곳인지는 잘 모르지만, 영화 속 블라디보스톡은 수천발의 총성이 들려도 경찰이 등장하지 않는 외딴 공간과 러시아 마피아라는 죽어도 싼 악당들을 대량으로 제공합니다. 실제 블라디보스톡의 치안 상황이 어떤지는 저도 모릅니다. 아무튼 동시에 네 명의 적을 쏘아 쓰러뜨리는 조인성(이걸 '사방쏘기'라고 해야 할까요), 수십개의 인형 케이스 같은 방탄유리 장식장을 사용한 액션은 한국 총격 액션의 신기원이라 부를 만합니다. '존 윅'이 부럽지 않습니다.
박정민, 박해준, 다들 멋진 연기를 보여주지만 역시 눈길이 가는 것은 조인성입니다. 40줄에 들어서며 '밀수'에서 다소 느끼한 섹시함을 장착하더니 〈휴민트〉에선 냉혹한 전사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줍니다. 차기 제임스 본드를 거론할 때 흑인 배우 이드리스엘바도 심심찮게 후보로 등장하는데, 이제는 최초의 아시안 본드 후보로 조인성이 거론되어도 손색이 없을 듯 합니다. (영어 공부는.... 열심히 하고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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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경은 왜 남한 노래를 부르지?
그리고 한가지. 해외 북한 식당에서는 종업원들이 춤과 노래를 공연하는 일이 흔합니다. 이 영화에서도 신세경이 무대에서 노래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놀랍게도 그 노래는 패티김의 대표곡인 '이별'입니다.
북한에서 남한 노래나 영화, 드라마를 감상하는 것이 중죄라는 사실은 탈북자들을 통해 익히 알려져 있는데, 뜻밖에도 이 노래는 예외적으로 북한에서 허용된다네요. 이유는 '김정일의 애창곡'이라서. 1999년, 평양에서 공연한 패티김은 "이 노래를 꼭 레퍼토리에 넣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별'을 부르고 나서, 5분 넘게 박수가 멈추지 않았다"고 회상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제작진이 굳이 이 노래를 넣은 것은 김정일의 선호 보다는, 노래에 담긴 정서를 살리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패티김은 1966년 작곡가 길옥윤과 결혼하고, 6년만인 1972년 이혼합니다. 1년 뒤, 길옥윤이 미리 작사/작곡했던 '이별'이 새 음반에 담겨 나오죠. 당시 패티김은 35세, 길옥윤은 46세.
'휴민트' 제작사 외유내강의 강혜정 대표는 "생전 길옥윤이 병상에 있던 시절, 패티김이 TV에 출연해 '이별'을 부르면서 길옥윤의 쾌유를 기원하는 모습이 강한 인상으로 남았다. 그런 고전적인 애틋함을 영화에 담아 보고 싶다고 류감독과 얘기하곤 했다"고 설명합니다. 길옥윤은 폐암 투병 끝에 1995년 작고합니다. 헤어지고 수십년이 지났어도 두 사람 사이는 보통 사람들과 달랐던 모양입니다.
산을 넘고 멀리멀리 헤어젔건만
바다 건너 두마음은 떨어졌지만
어쩌다 생각이 나겠지 냉정한 사람이지만
그렇게 사랑했던 기억을 잊을수는없을거야
그 설명을 듣고 다시 곱씹어 볼수록, 가사의 고전적인 애절함이 여운으로 남습니다. 〈휴민트〉는 줄거리가 꽉 찬 영화는 아닙니다. 오히려 줄거리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은 뼈대만 남기고, 인물과 인물들 사이의 관계는 상당 부분 관객이 스스로 보충하게 한 영화죠. 대신 그 빈 자리는 담대한 액션과 기타 볼거리가 꽉 들어차 있습니다. 그리고 이 노래 한 곡으로 구구절절 설명 없이 그 많은 사연을 대신할 수 있다는게 명곡이 가진 힘이라고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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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평
처음으로 돌아가서, 그럼 조인성의 '대한민국 헌법 3조'는 뭘까요. 아마도 류승완 감독의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는 기원 같은 것이겠죠. 최인훈의 소설 '광장'을 연상시키는 마지막 시퀀스까지 영화는 아주 조심스럽게 '산을 넘고 멀리 멀리 헤어진' 것은 주인공들만이 아니라는데 여전히 깊은 관심을 보입니다. 세상이 어떤 방향으로 가든, 누군가는 그런 고민을 계속해야겠죠.
한 줄 요약: 풍성한 액션, 놀라운 볼거리, 선명한 대립, 머뭇거리지 않는 전개, 애틋한 감성, 세상의 변화까지 담은 수작. 류승완의 완숙함이 느껴진다. 강력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