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올로기 아닌 아픔과 극복 다뤄…나는 대중영화 감독"
"항상 다음 작품이 대표작"…'내 이름은' 포럼 부문 초청
베를린 입성 정지영 감독 "제주 4·3 이름 함께 찾아가는 영화"
"이데올로기 아닌 아픔과 극복 다뤄…나는 대중영화 감독"
"항상 다음 작품이 대표작"…'내 이름은' 포럼 부문 초청
(베를린=연합뉴스) 김계연 특파원 = "4·3 기념관에 가면 제일 처음 만나는 게 백비예요. 비석은 있는데 아무것도 안 써 있어요. 누구는 폭동이라고 하고 누구는 항쟁이라고 하고, 이름을 못 정하고 있어요. 4·3의 이름을 국민과 같이 찾아가는 영화라고 보면 돼요."
1947년 3월1일 제주 관덕정 인근에서 기마경찰 말에 한 어린이가 치였다. 경찰이 항의하는 시민들에게 발포하면서 수많은 무고한 도민의 목숨을 앗아간 제주4·3이 촉발됐다.
12일(현지시간) 독일 베를린에서 만난 정지영(79) 감독은 4·3의 시작부터 전개까지 한참을 설명했다. 5·18민주화운동이나 6월 민주항쟁과 달리 4·3은 아직 공식 명칭이 없다. 어떻게 부르면 좋겠느냐고 묻자 "피해자와 가해자가 제주도에 섞여 살고 있다. 국가가 시켜서 한 일이지만 아직도 숨기고 싶어 한다"며 "화해와 극복의 의미가 담긴 이름이면 좋겠다"고 했다.
정 감독은 4·3을 그린 '내 이름은'을 들고 베를린영화제를 찾았다. 영화제 측은 이 작품을 포럼 부문에 초청하면서 "비극적 역사가 남긴 트라우마를 세대를 넘어 섬세하게 비추며 오랜 침묵을 깨는 작업의 중요성을 환기한다"고 평했다. 영화는 13일 저녁 처음 관객을 만나고 두 차례 더 상영한다.
'내 이름은'은 촌스러운 이름이 싫은 고등학교 2학년 영옥(신우빈 분), 4·3의 상처를 간직한 엄마 정순(염혜란)이 이름에 얽힌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고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과정을 그린다.
정 감독은 4·3영화 공모전에서 당선된 작가가 시나리오를 들고 찾아왔을 때 처음에는 거절하려고 했다. '남부군'(1990)과 남영동1985(2012)에서 다룬 이데올로기 문제를 반복할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하지만 시나리오를 읽어보고 마음을 바꿨다. 이름을 매개로 역사 속으로 들어가는 아이디어가 마음에 들었다. 정 감독은 "이데올로기 문제가 아닌 4·3의 아픔과 극복을 다루는 영화를 만들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래서 시나리오를 대폭 손보면서도 이런 메시지가 함축된 제목만은 안 바꿨다고 한다.
정순 역에 염혜란을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를 다시 썼다. 제주를 배경으로 한 넷플릭스 오리지널 '폭싹 속았수다'에서 압도적 연기를 선보인 염혜란이 "다음 작품도 꼭 같이 하자"고 했기 때문이다. 정 감독은 전작 '소년들'(2023)을 연출할 때 염혜란과 호흡이 잘 맞았다고 말했다.
"다른 감독들도 만들려고 노력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이게 왜 안 되냐면, 투자를 할 사람이 없어요." 관객에게 잘 알려지지도 않은 4·3 소재 영화에 기업 투자가 붙을 리 없었다. 정 감독은 크라우드 펀딩을 시작하고 함세웅 신부, 백낙청 교수, 조정래 작가, 현기영 작가 등 원로들을 찾아가 제작추진위원회를 꾸렸다.
크라우드 펀딩으로 목표치 4천300만원의 10배 가까운 4억427만1천원을 모았다. 한국 극영화 펀딩으로는 역대 최고 기록이었다. 정 감독은 "10억이 모이면 10억짜리, 15억이 모이면 15억짜리 영화를 만들겠다는 각오로 시작했다"며 "4억이라는 돈이 생기니까 '국민이 이렇게 지원해주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제작사는 국내 개봉을 두 달 앞둔 지금도 영화 홈페이지를 통해 계속 투자받고 있다.
정 감독은 한국전쟁('남부군')부터 론스타 사건('블랙머니')까지 한국 현대사의 굵직한 장면들을 정면으로 다뤄온 사회파다. 스크린 바깥에서는 1988년 스크린쿼터 폐지 반대 운동을 하며 외화 상영관에 뱀을 푼 일화가 유명하다. 베를린영화제 측은 '한국 좌파 감독의 아이콘'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자신을 '대중영화 감독'으로 규정했다. "내가 하고 싶은 얘기를 한다. 다만 되도록 많은 대중과 나누고 싶다. 이런 자세로 만들어요. 영화를 가장 힘들게 만드는 사람 중 하나 아닐까. 대중들이 별로 안 좋아하는 이야기 가지고 대중과 호흡한다는 게 얼마나 힘들겠어요. 그래서 재밌어야 해요."
1983년 '안개는 여자처럼 속삭인다'로 연출을 시작해 올해 44년차, 현역으로 활동하는 최고참 감독이기도 하다. 그는 이번 영화가 몇 번째 작품인지 모른다고 했다. "맨날 까먹어요.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현재와 미래를 봐요. 그러다 보니까 몇 작품을 했고 뭐가 대표작이고 이런 것도 안 따져요. 항상 다음 작품이 대표작이라고 생각하면서 삽니다." 차기작으로는 김구 암살사건을 구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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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계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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