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영등포구 대림동에 50년 넘게 산 김모(71)씨의 휴대전화 화면에는 번역기 애플리케이션(앱) 2개가 깔려 있다. 동네에 점점 중국어 간판이 늘어나 이를 읽기 위해선 번역기가 반드시 필요해졌기 때문이다. 김 씨는 “인생 대부분을 산 동네인데, 이젠 매일 다니는 길에 있는 간판들도 제대로 읽을 수 없게 됐다. 무슨 가게인지 알려면 번역기로 찍어 하나하나 검색해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 영등포구·구로구 등 서남권 도심을 중심으로 외국어 간판이 빠르게 늘어나며 거리를 장악하고 있다. 외국인 거주자가 늘어난 영향이지만, 법적으로 한글 없이 외국어만 적는 것은 불법인데다 불편함을 호소하는 시민들도 많아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 개선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중앙일보가 서울 지하철 대림역 7번 출구에서 9번 출구까지 약 200m 구간의 1층 점포 간판을 살펴본 결과 29곳 중 14곳(약 48%)이 중국어·영어 등이 주로 사용된 외국어 간판이었다. 한국어가 한켠에 작게 적혀 있는 경우도 있었지만, 아예 외국어만 있는 간판도 있어 해당 언어를 모르는 이들은 무슨 점포인지 아예 식별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배달 노동자들이 모인 커뮤티니엔 “대림동에서 배달하려면 한자까지 꼭 알아야 한다”거나“간판이 다 외국어라 가게 찾기가 어렵고 배달 시간이 오래 걸려서 화가 난다” 등의 불만 글이 다수 올라 와 있다.
또한 한글문화연대의 ‘2025년 서울시 옥외광고물 한글 표기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서울 시내 간판 중 순 한글 간판의 비중은 절반(50.2%)에 불과했다. 조사 대상 7129개 간판 중 외국어만 적힌 간판은 2086개(29.3%), 외국어와 한글을 병기한 간판은 1457개(20.4%)였다. 특히 서남권 지역의 병기 간판 비율은 서울시 평균보다 4%포인트 높고, 순 한글 간판 비율은 0.4%포인트 낮은 수준이었다.
전문가들은 난립하는 외국어 간판이 주민들의 알 권리를 침해할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이영애 인천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외국어 간판 때문에 가게에 대한 정보 접근이 어려우면 소비자들의 선택권이 제한 되는 것”이라며 “주민들이 소외감을 느낄 수도 있다”고 분석했다.
옥외광고물법 시행령 제12조는 ‘광고물의 문자는 원칙적으로 한글로 표시해야 하며, 외국 문자로 표시할 경우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한글과 병기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특별한 사유란 특허청에 등록된 상표를 사용하는 경우를 말한다. 대부분의 경우 간판에 한글 없이 외국어만 표기하는 것은 법 위반에 해당하는 것이다.
하지만 신고 및 허가 간판의 범위가 제한적이라 현행법에 맞춰 제대로 관리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관리 당국인 구청에 허가 및 신고해야 하는 간판의 기준은 간판 면적이 5㎡ 이상이거나 간판이 건물 4층 이상에 설치되는 경우다. 저층에 걸리는 작은 간판들의 경우 허가 및 신고 의무가 없어 구청이 표기법을 제대로 따랐는지 사전에 파악하기는 쉽지 않은 것이다. 때문에 불법 간판을 신고하는 민원이 발생할 때마다 관리 당국이 현장을 단속하는 방식으로 관리가 이뤄지고 있다. 영등포구청 관계자는 “민원 발생 시 현장을 방문해 즉각 조치를 취하고 있다”면서도 “규제 대상이 아닌 간판 현황을 일일이 파악긴 어려운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구로구청 관계자도 “신고 및 허가 대상이 아닌 간판들은 규제하기 애매한 부분이 있다”고 토로했다.
불법 외국어 간판을 내걸었다 단속 당한 업주들은 대부분 “한글을 병기해야 한다는 규정을 알지 못했다”고 밝혔다. 영등포구 대림동에서 중국 식료품 가게를 운영하는 오모(57)씨는 지난해 봄 단속을 나온 구청의 계도에 따라 외국어만 쓰여 있던 간판에 한글을 추가로 써넣었다. 이 과정에서 추가금을 지불해야 했다. 오 씨는 “애초에 주요 손님들이 중국인이라 상호를 중국어로 써 간판을 만든 것 뿐”이라면서 “간판 제작 업체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아서 불법인지 전혀 몰랐다. 한글을 병기해야 하는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당연히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각에선 무조건적으로 제재하기보단 사회적 논의를 통해 지역 상황과 점포 사정에 맞는 실효성 있는 제도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윤인진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외국인이 주요 고객인 가게의 경우 외국어 간판을 쓰는 것이 업주 입장에선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볼 수도 있다”며 “이주민 수도 과거에 비해 크게 늘어나고 이들이 집단 거주하는 지역도 있는 만큼 관련 규정이 합리적인지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고 제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