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보스톡을 무대로 남북한의 치열한 첩보전을 그린 영화 '휴민트'에는 북한 식당 지배인(박명신)이 함께 일하는 종업원 채선화(신세경)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내가 아는 사람중에 캄보디아에서 조선(북한) 식당 하는 사람이 있는데, 얼마 전에 그 밑에 데리고 있던 아이 하나가 남조선 남자와 눈이 맞아서 도망을 갔다더라. 너도 기왕이면 살 길을 잘 찾아봐.'
수많은 관객 중에 이 장면에서 유독 웃음보가 빵 터진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한수애씨(33)와 남편(43). "옆 사람들은 왜 웃나 했을 거에요. 그거 제 얘기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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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신세경의 모델, 북한 사투리에서 노래까지
1993년 평양에서 태어난 한 씨는 북한 대외봉사일꾼양성학원에서 2년 반의 교육을 마치고 캄보디아 씨엠립의 북한 식당에서 일하던 도중, 지금의 남편을 만나 목숨을 건 탈출에 성공했다. 현재 남한에서 '통일메아리악단' 단원과 유튜버로 활동하고 있는 한 씨는 영화 '휴민트' 기획 초기부터 고증 담당, 특히 신세경이 연기한 여주인공 채선화의 실제 모델 역할을 했다.
대사뿐만 아니라 영화에서 신세경이 부른 패티김의 노래 '이별'도 한 씨의 지도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북한식으로 노래하는 샘플을 만들어 전달하고, 며칠 뒤 신세경씨의 노래를 들었는데, 제가 부르는 것 같았어요. 배우는 역시 대단하구나 했습니다."
한 씨는 지난 2012년부터 캄보디아의 도시 씨엠립의 북한 식당에서 약 4년간 일했다. 해외 북한 식당 종업원은 충성심, 집안 성분, 외모와 악기 등 개인기, 외국어 실력 등을 모두 갖춰야 할 수 있는 일이다. 여기에 월 150달러(당시 기준)라는 월급까지, 북한 젊은이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라 대략 1000대 1의 경쟁을 뚫어야 했다. "남한 사람들은 '애걔' 할 금액이죠. 하지만 당시 북한에선 정말 큰 돈이었습니다."
함께 일하던 종업원은 모두 16명. 이들의 임무는 '식당의 매상을 높여 외화를 획득하는 것'이었다. "남한 사람들은 적이고, 그 주머니를 터는 것은 애국이다. 그러니 필요하면 여우 짓이라도 아끼지 말라고 교육을 받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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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일 동안 매일 찾아온 남자
한씨의 철통 같은 사상무장은 2013년 지금의 남편을 만나면서 봄눈처럼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건설회사 직원으로 캄보디아 파견 중이었던 남편은 어느날 혼자 찾아와 "100일간만 커플이 되어 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북한 식당들은 예약을 할 때 자신이 원하는 종업원을 접객 담당으로 선택할 수 있었다. 정말 100일 연속으로 찾아왔을까? "그럼요. 120번은 왔을걸요. 점심에도 오고, 저녁에도 오고…."
사실 한 씨의 식당 생활은 그리 편하지 않았다. "종일 일하고, 휴일은 한달에 한번, 다 같이 시내에 외출했다 돌아오는 것 뿐이었어요. 방도 4명이 같이 쓰고, 개인행동은 상상할수도 없었습니다."
가장 괴로운 건 동료들과도 쉽게 마음을 터놓을 수 없었다는 것. 같은 종업원 사이에도 동태를 보고하는 보위성 요원이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때 남편은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얄미운 동료의 흉을 보기도 하고, 가끔은 절대 금기인 북한 이야기, 가족 이야기도 나눌 수 있었다.
그렇게 몇해가 지나고, 거의 매일 끼니를 함께 하면서 두 사람 사이에선 사상이고 분단이고 하는 것들이 모두 의미가 없어졌다. "하루는 제 앞에서 김정은 흉내를 내면서 장난을 치더라고요. 교육받은 대로 하면 '당장 나가!'하고 내쫓아야 하는 상황이죠. 그런데 저는 그냥 픽 웃으면서 '오빠, 여기선 그러시면 안 됩니다' 하고 말았어요."
이런 한 씨의 태도를 보고 남편은 '아, 세뇌가 풀렸구나'하고 생각했다. 남편이 얘기하는 한국 생활은 한씨에겐 도대체 상상할 수도 없는 이야기 투성이였지만, 어느새 두 사람은 조심스럽게 '언젠가 우리가 함께 살 수도 있지 않을까'하는 꿈을 나누고 있었다. 그만치 한 씨는 남편이 없는 씨엠립 생활을 상상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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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쌍해서 어쩌니", 그리고 "도망가자"
그러던 어느날, 지금의 시어머니가 찾아왔다. "남편이 제 얘기를 하도 많이 하니까 어머니는 걱정이 되셨던 거에요. '얘가 북한 여자 꼬임에 빠져 월북이라도 하면 어떡하니' 하셨대요." 하지만 정작 한 씨를 만난 시어머니는 눈물 한 바가지를 쏟으며 한 씨의 손을 꼭 잡아주고 돌아갔다. "제가 불쌍하다고, 남편과 제가 너무 애틋하다고 가슴 아파하신 거에요." 지금도 시어머니는 '아들은 버려도 며느리는 데리고 살겠다'고 하신다.
어머니 허락(?)까지 받은 남편은 마침내 "내가 여기서 데리고 나갈게"라고 말했다. 하지만 결단은 쉽지 않았다. 늘 평양에 두고 온 가족들이 눈에 밟혔던 한 씨는 탈주 날짜를 잡았다가, 거사 전날 '도저히 못하겠다'며 되물리는 일을 반복했다. 한씨가 북한으로 돌아가는 날짜가 잡힌 뒤, 남편의 끈질긴 설득에 마침내 한 씨도 마음을 굳혔다.
떠나기 전날 밤, 친하게 지내던 동료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 친구도 손님 한 사람과 각별한 사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만약에 그 사람이 같이 달아나자고 하면 갈거니?" 가만히 바라보던 그 친구는 한 씨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언니, 저는 그 사람이 가자고만 하면 당장 따라갈 것 같아요." 이 격려 덕분일까. 용기를 낸 한씨는 다음날 귀국 선물을 산다며 시장에 간 뒤, 감시원을 따돌리고 남편의 차에 오를 수 있었다. 지금도 한씨는 그 친구의 눈빛을 잊지 못한다.
두 사람은 미리 계획한대로 브로커를 통해 태국 국경을 몰래 통과했고, 다시 방콕 한국 대사관으로 여섯 시간 동안 차를 달렸다. 대사관에 한 씨를 인계한 뒤에야 남편은 한숨을 돌렸다. 각각 한국으로 날아온 두 사람은 6개월 뒤, 한 씨에 대한 조사가 끝나자마자 결혼식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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끔찍했던 현실, "우리는 정말 운이 좋았구나"
한 씨는 '엄마'가 된 뒤 '탈출'의 의미를 새삼 깨달았다고 말한다. "내가 그냥 북한에 살았다면 꿈도 꿀 수 없었던 것들을 아이에게 해 줄수 있다는 게 정말 기뻐요. 그때 남편을 따라나서지 않고 북한으로 돌아갔다면, 평생 얼마나 많은 후회를 했을까요." 현재 한 씨는 둘째를 임신중이다.
사실 한 씨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북한 여성들이 어떤 위험에 놓여 있었는지 잘 몰랐다. 2023년 미국 국무부의 '세계 인신매매 보고서'는 북한의 충격적인 실태를 고발했다. 국경지대 브로커들이 탈북을 명목으로 북한 여성들을 빼돌려 중국의 인신매매 조직으로 넘긴 사례가 적지 않고, 수많은 인권유린 사례에 북한 당국자들이 연루되어 있다는 내용이었다. 경영난에 몰린 북한 식당이 외국인 업자들에게 여성 종업원들을 '빚 대신 넘긴' 사례도 기록됐다.
'휴민트'를 본 한 씨는 옛날 자신과 똑같은 극중 북한 식당 종업원들의 의상이 반갑기도 했지만, 그들의 삶이 너무 어둡게 그려져 가슴아프기도 했다. "남편에게 물어봤어요. '오빠, 만약에 영화 내용처럼 그때 나를 돈 내고 밖으로 데리고 나올수도 있었으면 어땠을 것 같아?' 그랬더니 남편이 그러더라고요. '그랬으면 그냥 쉬운 사이로 끝났을 수도 있겠지'. 우리는 정말 운이 좋았구나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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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도 대한민국의 보호를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극중 국정원 요원 조과장(조인성)은 채선화에게 "대한민국 헌법 3조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부속도서다. 그러니 북한에서 태어난 당신도 대한민국 국민으로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고 말한다. 사실 이 대사는 한 씨의 실제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제가 2016년, 입국 후 조사 받을 때 수사관 한 분이 저에게 헌법 3조 이야기를 해 줬어요. 그때 이 말이 얼마나 감동적이었는지 몰라요. 아, 나도 이 나라에서 살 자격이 있는 사람이구나. 제가 감독님께 이 이야기를 해 드렸는데 그 얘기가 와 닿으셨나봐요. 영화에서 조인성씨 목소리로 그 말을 듣는데, 또 한번 울컥 하더라니까요."
극중 북한 인물들의 대사를 한국어 자막으로 처리한 것도 한 씨에겐 충격적이었다. "뒷자리에 젊은 여자분들이 앉았는데, 그분들은 정말로 북한 사투리를 못 알아듣는 것 같았어요. 저는 좀 슬펐어요. 영화에 나오는 전라도 사투리, 경상도 사투리도 못 알아들을 수 있는데, 거기에 자막까지 붙이지는 않잖아요. 그래도 한 민족인데..."
한씨가 기대하는 건 사람들이 '휴민트'를 보고 북한과 북한 사람들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는 것. "정말 소중한 영화에요. 많이들 보시고, '저 북쪽에도 사람들이 살고 있구나'하는 생각을 잊지 않아 주셨으면 좋겠어요. 북쪽에 김정은과 핵무기만 있는 건 아니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