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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원섭의 와칭] '지옥의 묵시록' 킬고어 대령, 영면에 들다

중앙일보

2026.02.16 17:15 2026.02.16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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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지옥의 묵시록'에서 킬고어 대령 역을 맡은 로버트 듀발. 사진 유튜브 캡처
월남전 당시 미군은 정글 속에서 신출귀몰하는 베트콩 병사들에게 엄청나게 시달렸다. 그래서 동원된 무기가 이미 2차대전에서 효과가 입증된 네이팜(Napalm)탄이었다. 네이팜은 휘발유와 스티로폼 성분을 섞어, 목표 지역에 투하되면 흘러내리지 않고 나무든 벽이든 달라붙어 오래오래 불타게 하는 지독한 무기였다. 피부에 불이 붙으면 다 탈 때까지 떼낼 수 없고, 주변의 산소를 순간적으로 소모해 질식을 유발했다. 한마디로 숨어 있는 사람을 살상하기 위한 가장 끔찍한 무기 중 하나였다.

이 네이팜이라는 폭탄을 유명하게 만든 사람으로 킬고어 대령을 빼놓을 수 없다. 베트남에 투입된 미군 헬리콥터 전단 지휘관인 이 사람은 공격용 헬기 앞에 스피커를 매달고 바그너의 ‘발퀴레의 기행’을 크게 틀곤 했다. 그의 가장 유명한 말은 “나는 아침의 네이팜탄 냄새가 너무 좋아”였다.

이 미친 인간은 다행히 실존 인물이 아니다.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영화 ‘지옥의 묵시록’에서 킬고어 대령 역을 연기한 로버트 듀발이 2026년 2월16일(현지시간), 미국 버지니아주의 농장 자택에서 사망했다. 향년 95세.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6일(현지시간) 트루스소셜에 ‘치포칼립스 나우(Chipocalypse Now)’라는 문구가 적힌 AI(인공지능) 합성 이미지를 게시했다. 치포칼립스는 영화 ‘지옥의 묵시록’의 영문 원제 ‘아포칼립스 나우(Apocalypse Now)’와 ‘시카고(Chicago)’의 합성어로 추정된다. 트럼프의 얼굴이 합성된 인물은 영화 '지옥의 묵시록'에서 로버트 듀발이 연기한 전쟁 미치광이 킬고어 대령. 사진 트루스소셜 캡처



로버트 듀발, 더스틴 호프만, 진 해크먼, 삼총사의 시대

듀발은 1931년, 뒷날 해군 소장에 오른 군인 아버지와 아마추어 배우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대학에서 연기를 전공한 뒤 24세 때 뉴욕으로 가서 연기학교를 다니며 본격적인 배우의 길을 걷기 시작했는데, 이때 룸메이트가 6세 연하의 더스틴 호프만이었고, 한살 위의 진 해크먼도 늘 어울려 다니는 친구였다. 셋 다 20~30대에는 무명의 연극배우 신세였지만 호프만은 ‘졸업(1967)’, 해크먼은 ‘프렌치 커넥션(1971)’으로 먼저 스타덤에 올랐다. 혼자 남으면 처량했을 41세의 듀발은 다행히 ‘대부(1972)’로 대기만성, 친구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대부’에서 듀발이 연기한 변호사 톰 하겐은 지극히 차분하고 현실적인 마피아의 고문(이 역할 때문에 ‘고문’을 뜻하는 이탈리아어 '콘실레리에레 consigliere가 유명해졌다)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분명 주인공은 아니었지만 ‘대부2’에서는 대부 마이클 콜리오네(알 파치노)가 냉철한 하겐을 해임하고 나서야 본격적으로 폭주한다는 줄거리가 펼쳐질 정도로 존재감이 강했다.

할리우드 배우 로버트 듀발. 로이터=연합뉴스


오스카의 저주, 현실과 영화

불행히도 듀발은 ‘대부3’에 출연하지 못한다. 1983년 영화 ‘부드러운 자비(Tender Mercies)’에서 쇠락해가는 컨트리 가수 연기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뒤 출연료가 폭등했기 때문이다. 연기파 배우들이 오스카 수상 후 작품 선택에 어려움을 겪게 되는, 이른바 ‘오스카의 저주’에 대해 듀발은 “스타가 되는 것은 에이전트의 꿈이지, 배우의 꿈은 아니다”라는 냉소적인 말을 남기기도 했다.

듀발이 한국 관객들에게 가까워진 계기로는 1980년 TBC TV를 통해 방송된 6부작 미니시리즈 ‘아이크’도 들 수 있다.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전 미국 대통령이 2차대전 당시 연합군 총사령관일 때의 이야기를 담은 이 드라마는 당시 한국에서도 큰 화제가 됐다. 단 늘 웃는 얼굴의 부드러운 인상이던 아이젠하워와 다소 엄격해 보이는 듀발의 외모가 그리 닮지 않았다는 지적도 있었는데, 한국의 한 평론가도 “우리가 기억하는 아이크와 외모는 좀 달랐지만 구성과 내용은 최고”라고 극찬했다.

현실의 듀발은 할리우드 스타들의 정치 참여에 부정적인, 다소 소극적인 사람이었지만 그가 킬고어 대령을 연기한 ‘지옥의 묵시록’이 공개되고 1년 뒤, 1980년 UN은 ‘극단적인 비인도성’을 이유로 네이팜탄을 전시 사용 금지 무기 목록에 포함시킨다. 그렇게 그는 현실을 바꿨다.

'대부'에서 톰 하겐 역을 맡은 로버트 듀발. 사진 유튜브 캡처


가수로도 재능을 뽐내다

오스카 남우주연상을 받은 영화 ‘부드러운 자비’에서 듀발은 이 영화에 나오는 거의 모든 노래를 직접 작사-작곡하고 부를 정도로 음악에 조예가 깊었다. 통산 일곱 차례 오스카 연기상 후보로 올랐지만, 수상작은 ‘부드러운 자비’ 하나다. 이 영화의 끝부분에서 듀발은 이런 말을 한다. “난 잘 모르겠어. 왜 여자들은 나보다 먼저 죽는지. 왜 내 딸은 죽고 나는 살아 있는지.” 결국 인생의 평화는 모든 일어나는 일들을 이유를 따지지 않고 받아들이는 데 익숙해져야 찾아온다는 것을 말해주는 부분이다.

로버트 듀발이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영화 '부드러운 자비'의 포스터. 사진 인터넷 캡처
아마도 듀발의 만년은 그렇게 평온했던 것으로 보인다. 노년에 접어든 듀발은 강렬한 개성 대신 편히 볼 수 있는, 지혜로운 노인 역을 자주 맡았다. 41세 연하의 아내와 2005년 재혼한 뒤 해로했고, 90세가 넘어서도 활동을 멈추지 않았던 그의 마지막 모습들은 넷플릭스의 ‘페일 블루 아이즈’나 ‘허슬’에서도 볼 수 있다.

그렇게 마지막까지 조용히, 하지만 멈추지 않았던 그를 조상한다. 부디 내내 평안하시길. 오랫동안 덕분에 즐거웠습니다.




송원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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