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타리나 비트(61·독일), 미셸 콴(46·미국), 그리고 김연아(35). 피겨 스케이팅 여자 싱글 레전드 계보를 잇는 대표 선수는 이 셋이다. 그 계보를 시작한 주인공 비트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17일(한국시간) 밀라노 아이스스케이팅 아레나 인근 국제빙상연맹(ISU) '홈 오브 스케이팅'에서 중앙일보와 만난 비트는 "전설로 불리는 것만으로 영광이다. 전설로 딱 한 명을 꼽긴 어렵다"며 "크리스티 야마구치나 옥사나 바이울, 타라 리핀스키 같이 훌륭한 선수도 있지만, 콴과 김연아는 오랫동안 꾸준히 활동해 좀 더 기여한 것 같다"고 했다. 이어 "콴이 올림픽(은1, 동1)에선 우승하지 못했으나 세계선수권(5회 우승)에서 잘 했고, 김연아도 좋은 성적을 오랫동안 냈다"고 했다.
비트는 올림픽 2연패(1984년 사라예보·1988년 캘거리)를 달성했다. 지금까지 2연패를 이룬 선수는 초창기 3연패(1928·1932·1936년)한 소냐 헤니(노르웨이)과 비트 뿐이다. 2010년 밴쿠버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김연아가 4년 뒤 소치에서 도전했으나, 판정 논란 속에 금메달이 아닌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당시 독일에서 경기를 중계했던 비트는 "실망스럽고, 말도 안 된다"며 아델리나 소트니코바(러시아)의 우승에 분노했다.
비트는 "아직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다. 김연아는 반짝반짝 빛나는 별 같았다. 그 날의 연기가 너무 좋았다"며 "2014년에도 금메달을 따면 나처럼 두 번 올림픽 챔피언이 되는 거라 여동생 같은 느낌으로 응원했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챔피언의 영광을 빼앗고 싶진 않지만…"이라면서도 "김연아는 많은 사람, 팬들의 기억 속에 오랫동안 선수로서 좋은 기량을 보여주면서 많이 기여했다"고 말했다. 당시 김연아는 착지 불안에도 소트니코바가 금메달을 따냈지만 덤덤하게 받아들였다. 비트는 "김연아가 정말 우아하게 대처했다. 스포츠맨십이 그런 거다. 김연아는 그걸 패배라고 받아들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비트는 동독 출신이다. 공산국가 출신이지만 피겨를 향한 대중들의 관심을 끌어올려 인기 스포츠로 끌어올리며 자본이 유입되게 만들었다. 독일 통일 이후엔 미국에서 주로 활동하며 아이스쇼와 영화 등에 출연했다. 무엇보다 그가 '피겨의 아이콘'이 된 건 단순한 동작에 머무르지 않고, 프로그램에 이야기를 담았기 때문이다. 비트 역시 그 점을 자랑스러워했다. 그는 "처음으로 여성성을 담은 스케이팅을 한 걸 높게 평가해준 것 같다. 내가 올림픽 챔피언이 된 건 '스토리 텔링' 덕분인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런 비트를 대표하는 프로그램이 '카르멘'이다. 비트는 1988 캘거리 올림픽 당시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 음악에 맞춰 '캐릭터'를 연기했다. 데비 토머스(58·미국)도 같은 카르멘을 연기해 둘의 대결이 '카르멘 전쟁'이라 불리기도 했다. 백인과 흑인, 이념 대결, 정반대의 곡 해석까지 어우러져 큰 관심을 받았다. 비트가 금메다르 토머스는 동메달을 차지했다. 비트는 "나와 토머스의 카르멘은 완전히 달라서 더욱 주목받았던 것 같다. 38년이 지난 지금까지 기억되고 있다니 영광"이라고 했다.
비트 이후에도 수많은 선수들이 카르멘을 연기했다. 김연아도 주니어 시절 연기했고, 콴 역시 카르멘을 소화했다.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올림픽에선 이해인(21·고려대)이 프리스케이팅곡으로 카르멘을 선택했다. 이해인의 카르멘 동영상을 본 비트는 "아주 좋은 선수고 훌륭하다. 내 카르멘과는 완전히 해석이 다르지만, 마지막 동작이 같아서 좋다"며 웃었다. 신지아의 연기도 본 비트는 "신지아는 김연아를 잇는 차세대 스케이터가 될 것 같다. 클래식한 연기, 깔끔한 점프, 스핀, 그리고 개성이 정말 마음에 든다"고 했다.
이번 올림픽 남자 싱글에선 상위권 선수들이 연달아 실수를 저질렀다. 그런 와중에 차준환(25·서울시청)의 쇼트 점수가 저평가됐다는 의견도 있다. "마지막 3명의 선수(사토 슌, 가기야마 유마, 일리야 말리닌) 프리스케이팅 연기만 봤다"고 한 비트는 차준환의 쇼트프로그램을 본 뒤 "판정에 대해 얘기하진 않겠지만, 매우 안정적이고 트리플 컴비네이션이 뛰어나다. 에너지 넘치고 정말 강한 프로그램"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