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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 행복통신문] 왜 그들은 말하지 못하는가

Los Angeles

2026.02.17 18:43 2026.02.17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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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서린 염 / 한인가정상담소 소장

캐서린 염 / 한인가정상담소 소장

성폭력은 자주 발생하는 범죄다. 그런데도 많은 피해자가 신고를 꺼린다. 성폭력 사건이 불거질 때마다 어김없이 따라붙는 질문이 있다. “정말 심각했다면 왜 바로 문제 삼지 않았을까.” 그런데 이런 질문은 피해자가 겪는 트라우마와  두려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다.  
 
한인가정상담소(KFAM)의 중요한 업무 가운데 하나가 성폭력 피해자 지원이다. 그들은 결코 자신이 당한 끔찍한 일을 혼동하지 않는다. 성폭력 피해자들은 자신의 피해를 정확하게 알고 있다. 그런데도 쉽게 말하지 못하는 이유는 두려움 때문이다. 수치심에 대한 두려움, 주변의 비난과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에 대한 두려움, 또 일자리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조직에서 고립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등이다. 특히 가해자가 직장 상사 등 권력을 가진 인물일 때, 과연 사람들이 내 말을 믿어줄까 하는 두려움도 생긴다.
 
회사의 저녁 회식에 참석했다가 성추행을 당한 여성이 8개월이 지나서야 상담소를 찾은 적이 있다. 가해자는 다른 부서의 고위 관리자였고, 회사 안에서 오랜 시간 신뢰와 영향력을 쌓아온 인물이었다. 그는 피해자에게 “너의 직속 상사와 10년 넘게 함께 일했다”며 피해 사실을 알릴 경우 불이익이 있을 것이라고 은근히 압력을 가했다. 만약 둘 중 한 사람의 말을 믿어야 하는 상황이라면, 회사는 본인 편을 들 것이라는 메시지였다. 이어 그는 피해자가 해고를 당한다면 “성실한 직원인데 아쉬울 것”이라는 말까지 했다. 사실상 말하지 말하는 경고였다.
 
 그녀에게는 일자리와 수입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 사안을 문제 삼았을 경우 ‘문제 직원’, ‘회사 분위기를 어지럽힌 직원’ 등의 낙인 찍히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다. 회사 동료들이 자신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거리를 두는 상상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가해자가 처벌을 받을 경우 생길 파장을 생각하면 스스로 죄책감까지 느꼈다.
 
그래서 그녀는 침묵했다. 그러나 침묵은 해결책이 아니었다. 사건 이후 8개월 동안 그녀의 일상은 조금씩 무너졌다. 남성과 단둘이 있는 상황을 의도적으로 피하게 됐고, 회사 행사에는 불안감이 앞섰다. 불면증에도 시달렸다. 겉으로는 ‘문제없는 직원’이었지만, 하루를 버텨내기 위해 소모되는 에너지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었다.
 
성폭력 피해자가 사실을 밝힌다는 것은 단순한 감정적 결단이 아니다. 그것은 생계 문제와 사회적 평판 등을 포함하는 복합적인 선택이다. 피해자는 자신의 삶과 미래보다 현재의 안녕을 지키기 위해 침묵이라는 위험을 감수한다.  
 
가해자가 직장 상사나 유력인사 등 권력을 가진 인물일 경우 불균형 문제는 더욱 심해진다. 피해자들은 사회 시스템이 결코 본인 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아직도 진실을 말하는 이에게 완전한 안전을 보장하지 못한다. 때로는 침묵이 더 합리적인 전략처럼 보이게 만드는 구조다. 피해자들이 피해 사실을 말하게 하려면 ‘왜 이제야 말하느냐’라고 묻지 말고, ‘왜 그동안 밝히기가 어려웠느냐’를 물어야 한다.  
 
성폭력을 예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를 위해서는 신고가 곧 보복이나 경력 단절로 이어지지 않는 직장 환경, 영향력 있는 인물이라도 예외 없이 조사받는다는 원칙, 그리고 트라우마는 시간이 지난 후에도 나타날 수도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이해 등이 필요하다.  
 
진정한 용기는 목소리의 크기나 반응 속도로 측정되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의지로 평가된다. 늦은 고백은 없다. 며칠 후이든, 몇 달 후이든, 혹은 수년이 흐른 뒤이든, 성폭력 피해를 말하는 그 순간이 가장 이른 때다. 피해자들이 용기를 냈을 때 그들을 보호하고 존엄성을 지켜주며 ,그들과 연대하는 것이 필요하다.  
 
성폭력 문제로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한인가정상담소는 24시간 핫라인 전화(213-338-0472)를 운영하고 있다.  

캐서린 염 / 한인가정상담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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