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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아줄 수 있어요"…'어쩔수가없다' 이병헌 딸 실제 주인공 사연

중앙일보

2026.02.17 22:48 2026.02.17 2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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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폐를 앓고 있는 첼리스트 이정현 양이 12일 오후 일산 mbc드림센터에서 연습에 앞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했다. 강정현 기자
“안아줄 수 있어요. 꼭 안고 싶어요.”

지난 12일 일산 MBC 드림센터에서 열린 ‘모두스 오케스트라’ 연습 현장에서 만난 첼리스트 이정현(충북예고 3년)은 첼로가 왜 좋은지를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두 시간 동안 준비한 문장이라고 했다. 몇몇 음절은 분명하게 맺히지 않았지만, 얼굴엔 큰 산을 넘은 양 환한 안도감이 번졌다.

이정현은 자폐 장애를 갖고 있다. 생후 27개월 무렵 진단을 받았다. 동시에 천재다. 일명 ‘서번트 증후군’. 일상적인 영역에서는 도움이 필요하지만 연주·미술·암기 등 특정 영역에서는 비상한 재능을 갖고 있다. 한글 대신 악보를 동화책처럼 술술 읽는 눈을, 어떤 음이든 정확히 짚어내는 귀를 갖고 있다.

그의 또 다른 별명은 ‘음악을 그리는 예술가’다. 그는 소리를 들을 때 색을 느끼는 ‘색청(Coloredhearing) 공감각자’다. 그가 알록달록한 점을 이어붙이며 음악을 표현한 ‘그림 악보’ 수십 점은 각종 기획전을 통해 꾸준히 전시됐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어쩔수가없다’ 속 만수 부부의 딸로 등장하는 리원이 그린 그림도 이정현의 작품이다.

자폐를 앓고 있는 첼리스트 이정현 양(오른쪽)과 엄마 양성선씨. 강정현 기자
그가 처음 음악을 배운 건 초등학교 3학년 때다. “아무렇게나 누른 7~8개의 불협화음을 정확히 알아맞히더라”는 2학년 특수 교사의 권유로 시작됐다. 동네 학원에선 가르치기 어렵다며 퇴짜를 맞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몇 달을 수소문 한 끝에 지인 소개로 피아노 선생님을 만났다. “말을 배울 땐 거북이 같았는데, 악기 연주는 그야말로 과속하며”(어머니 양성선·53) 내달렸다. 한두 달 만에 바이엘을 떼고 체르니로 진도를 뺐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가야금을, 5학년 때부터는 첼로를 배웠다. 이때까지만 해도 순전히 치료 목적이었다. 양성선씨는 “가야금은 정현이가 양 손을 쓰면 뇌 발달에 좋을 것 같아서, 첼로는 정현이가 고음을 싫어해서 시킨 악기였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성과가 나왔다. 첼로를 배우기 시작한 지 6개월 만에 나간 서울솔리스트 첼로앙상블 콘서트콩쿠르에서 초등부 3위를 한 것이다. 비장애인과 경합한 결과라 더욱 값졌다. 며칠 뒤 출전한 TJB(대전방송) 전국장애학생 음악콩쿠르에서는 금상을 받았다. 첼로를 배우고 앙상블 합주를 시작하면서는, 가만히 앉아있지 못하거나 시도때도 없이 노래를 부르는 습관도 확 나아졌다.
자폐를 앓고 있는 첼리스트 이정현 양이 그린 그림 악보. 강정현 기자

연주하는 곡들이 난이도를 높여가며 그의 ‘그림 악보’는 더 복잡해졌다. 이정현은 연습을 하지 않는 시간 틈틈이 모자이크 같은 선을 이어붙이는 그림을 그리곤 했다. 어떤 작품은 완성하는 데만 석 달이 걸리기도 했다. 종이뿐만 아니라 OHP 코팅지에도, 물병에도, 글라스 데코에도 그렸다. 그게 다 그의 머릿 속에 떠오르는 노래였다는 걸 엄마는 나중에 알았다. 양씨는 “어떤 그림은 쇼팽 폴로네이즈, 어떤 건 하이든 교향곡 45번이었다”며 “이제는 그림을 그릴 종이 크기까지도 정확히 cm 단위로 요구하며 그림을 그린다”고 말했다.

이정현의 그림은 난해한 퍼즐같아 보이지만 나름의 규칙이 있다. 그는 한 옥타브 내 12음 각각에 색을 부여한다. 가사나 멜로디에 따라 떠오른 이미지가 더해지기도 한다. 예를 들어 동요 ‘오빠 생각’의 그림 악보에는 말 탄 오빠와 논밭, 아이가 사는 집이 등장한다.

중1 때부터는 그림 악보로 대한민국팔공미술대전 서양화 부문 우수상 등 화가로서의 경력도 쌓았다. 지난해엔 ‘음악을 그리다’ 개인전도 열었고, 영화 ‘어쩔수가없다’에 그의 그림이 나오며 유명세도 탔다. 박찬욱 감독이 이정현에게 연락한 건 2년 전. 그의 기사 등을 보고 꼭 영화에 다루고 싶다는 뜻을 영화사를 통해 전해왔다. 이후 의상 등 소품을 담당한 조상경 의상감독이 직접 그를 찾아와 그림을 골라갔고, 자폐를 앓는 설정의 리원이 나오는 장면은 자문도 구했다.

자폐를 앓고 있는 첼리스트 이정현 양이 그린 그림악보. 강정현 기자
올해는 이정현에게 중요한 한 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MBC가 올 2월 창단한 장애인 쳄버 오케스트라(20여명 규모) ‘모두스’의 정단원이 된다. 연주로 월급을 받는 프로 음악가의 길로 들어서는 셈이다. 현재 이정현의 그림 악보는 충청북도와 충북문화재단이 주관하는 ‘별별공감’에서 3월 1일까지 전시 중이며, 4월에는 그림 악보로 한국장애인예술문화원이 주최하는 기획전시에도 화가로 참여한다.

자폐를 앓고 있는 첼리스트 이정현 양이 12일 오후 일산 mbc드림센터에서 연습에 앞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했다. 강정현 기자
그러나 거창한 목표는 없다. “벤자민 브리튼의 심플 심포니, 드보르자크의 첼로 협주곡 등을 연주해보고 싶다”(이정현)는 음악적 욕심이 전부다. 어머니 양씨는 “우리는 항상 목표를 두지 않는다. 달성 못하면 너무 힘드니까”라며 “그저 하루하루 보람되게 살고, 정현이의 그림과 음악을 많은 분들에게 보여드릴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말했다.



최민지(choi.minji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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