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예술원 회장과 국제극예술협회(ITI) 회장을 지낸 김정옥 연극연출가가 지난 17일 오전 별세했다. 94세. 고인은 60여년간 200여편의 연극을 연출하며 한국 연극만의 독창적인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1932년 광주에서 태어난 고인은 광주서중, 서울대 불문과를 졸업한 뒤 프랑스 소르본대학 영화학연구소에서 영화와 프랑스문학을 공부했다. 유학 당시 프랑스에서 만난 극작가 유치진(1905~1974)의 영향으로 연극과 인연을 맺었으며, 귀국 후 1959년 중앙대 연극영화학과 전임강사로 부임했다.
1962년 드라마센터 개관 공연 ‘햄릿’ 조연출을 거쳐 1963년 민중극장 창립 공연 ‘달걀’과 두 번째 작품 ‘대머리 여가수’를 연출했다. 이때 출연한 배우 중엔 박근형·오현주·김혜자·추송웅·박정자·김무생·권성덕·김정·구문회 등이 있다.
1966년에는 한국 무대미술의 선구자 이병복(1927~2017)과 함께 극단 ‘자유’를 창립했다. ‘따라지의 향연’(1966)을 시작으로 ‘무엇이 될꼬하니’(1978) 등을 잇따라 흥행시키며 국내 대표 연출가로 자리매김했다. 고인이 평생 강조한 예술적 화두는 ‘한국 연극의 정체성’이었다. 2011년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적 문화유산을 최대한 연극에 도입해보자고 해서, 판소리며 무속·가면극·무술 등을 활용했다”며 그 결정체로 ‘무엇이 될꼬하니’를 꼽았다.
고인은 1995년부터 2002년까지 국제극예술협회(ITI) 세계본부 회장을 아시아인 최초로 역임했다. 2000년 한국문화예술진흥원장, 2011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등을 지냈고, 2002년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프랑스 최고 등급 문화예술 공로 훈장인 꼬망드레를 받았다. 이외에도 대한민국예술원상(1993), 최우수예술인상(1995), 대한민국 금관문화훈장(2024) 등을 받았다.
2004년엔 경기도 광주에 ‘얼굴 박물관’을 열어 얼굴에 담긴 삶의 미학을 보존하는 데 힘쓰기도 했다. 고인의 별세 소식에 손진책 대한민국예술원 회장은 “고인은 현대 연극의 기반을 구축하고, 한국 연극을 세계화한 분”이라며 “합리적이고 판단이 명석했던 분이셨다”고 추모했다.
유족은 부인 조경자씨, 자녀 김승미 서울예대 교수와 김승균 얼굴박물관 이사, 사위 홍승일 전 중앙일보디자인 대표 등이 있다. 빈소는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 14호실. 발인은 20일 오전 7시 30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