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 윤석열 전 대통령에게 내란 우두머리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한 지귀연 부장판사(52‧사법연수원 31기)는 12‧3 비상계엄을 “국헌문란 목적의 내란”으로 정의했다. 이날 지 부장판사는 법원 마크가 그려진 은색 넥타이에 법복을 입고 1시간 동안 판결 요지를 읽었다. 평소와 같이 이마를 덮은 수더분한 머리는 그대로였지만 선고하는 내내 어느 때보다 단호한 목소리였다.
“왕도 국민주권 침해 땐 반역”
지 부장판사는 1시간 동안 한 차례도 미소를 보이거나 예정에 없는 말은 하지 않았다. 준비해 온 A4용지의 판결 이유를 읽으면서 윤 전 대통령이 앉은 피고인석을 몇 차례 쳐다보기도 했다. 그는 “우리 헌법은 비상계엄을 하더라도 국회 권한을 침해할 수 없게 정하고 있는데, 이를 목적으로 비상계엄을 선포한 건 국헌문란 목적의 내란죄를 성립할 수 있다”며 “다시 강조하는데 이 사건 핵심은 군을 국회로 보낸 것”이라고 밝혔다.
지 부장판사는 국헌 문란 목적을 인정하면서 잉글랜드왕 찰스1세(1600~1649)가 반역죄로 처형당한 사례를 언급했다. 그는 “의회와 갈등이 생긴 찰스1세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의사당에 난입해 의회를 강제 해산했다. 결국 왕이 국가에 대해 반역을 했다고 명백히 인정됐다”며 “국민주권을 위임받은 의회에 대한 공격은 왕이라고 하더라도 국민 주권을 침해한 것으로 되어 반역죄가 성립된다는 생각이 널리 퍼졌다”고 설명했다. “대통령은 내란의 주체가 될 수 없다”는 윤 전 대통령 측 주장을 역사적 논거를 들어 정면으로 반박한 것이다.
또 “반국가세력과 다름없게 된 국회에 대해 자유민주주의 체제 수호를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는 윤 전 대통령 측 주장에 대해 “이유나 명분을 목적과 혼동한 주장”이라며 “성경을 읽는다고 촛불을 훔칠 수는 없다”는 서양 속담을 인용하기도 했다.
“계엄으로 어마어마한 사회적 비용”
지 부장판사는 양형 이유를 설명하면서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는 사정은 이 사건 비상계엄 선포로 군과 경찰의 신뢰와 대한민국의 대외 신인도가 크게 하락하고, 우리 사회가 양분돼 극한의 대립을 겪은 것”이라며 “수많은 사람이 수사를 받고 법정에 나왔다. 비상계엄을 수행한 군인과 경찰은 사회적 비난과 법적 책임도 져야 한다. 상관 지시의 적법성과 정당성에 대한 군인과 공무원의 신뢰도 훼손됐다. 어마어마한 사회적 비용”이라고 지적했다. 이전까진 부드러운 분위기로 윤 전 대통령 측 주장을 모두 경청했지만 판결을 하면서는 엄중한 경고를 내렸다는 풀이가 나온다.
지난해 2월 내란 우두머리 사건 1차 공판준비기일을 연 이후 주 3~4회 심리하면서 보여 온 부드러운 분위기와 달랐다. 그는 앞선 재판에서 변호인이 항의하면 “불쾌하셨다면 죄송하다. 100% 제 잘못”이라고 사과하거나 국무위원 진술을 정리하면서 “장관님 이름 좀 뽑아놓고 외워야겠다. 이 나라 장관님 이름을 모르니까 미안하다”고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공수처 내란 수사권 인정
이날 그는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의 수사 범위에 대한 판단도 내놨다. 지 부장판사는 “공수처에 내란죄 수사권한을 인정하는 게 타당하다”며 “공수처는 직권남용은 수사할 수 있을 뿐 내란죄 수사권한은 없지만, (내란 혐의를) 수사 과정서 인지한 직접 관련성 있는 범죄로 보는 게 바람직하다”고 밝혔다. 이어 “또 공수처 수집 증거를 빼더라도 유죄 증거가 충분하다”고 덧붙였다. 지 부장판사는 지난해 3월 공수처엔 내란죄 수사권이 있는지 명확한 규정이 없다는 이유 등으로 윤 전 대통령의 구속 취소를 결정한 바 있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수사 권한이 있다고 결론내렸다.
서울 출신의 지 부장판사는 서울 개포고와 서울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1999년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2005년 인천지법에서 법복을 처음 입은 뒤 2015년과 2020년엔 법원 내 주요 보직인 대법원 재판연구관을 두 차례에 걸쳐 6년간 지냈다. 법원 내 엘리트 판사 중 한 명으로 꼽힌다. 2024년 2월엔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간 합병에 부당하게 개입한 혐의로 기소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에게 무죄를 선고했고, 지난해 12월엔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으로 기소된 박지원 전 국정원장, 서욱 전 국방부 장관에게 무죄를 선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