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과 상식이 파괴된 역차별적인 합의이며 이로 인해 현장 직원들의 분노와 취준생들의 허탈감과 좌절감이 극에 달했다.”
한전KPS 노조는 19일 서울 여의도 한국노총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의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 정책을 비판하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정부 주도로 한전KPS가 발전설비 정비 하도급업체 근로자 약 600명을 직접 고용하기로 한 데 대한 반발이다. 정치권과 정부가 노동정책을 밀어붙이는 과정에서 공공기관이 ‘노노 갈등’ 부작용을 앓고 있다. 2017년 인천국제공항공사 정규직 전환 과정에서 ‘공정성’ 논란을 촉발했던 이른바 ‘인국공 사태’가 재연되는 모습이다.
한전KPS 노조의 반발을 불러일으킨 건 지난 10일 정부가 발표한 노정 합의서다. 정부는 민주노총 중심의 고용·안전 협의체와 합의한 것에 맞춰 한전KPS 하청 노동자 600명을 직접 고용하겠다는 방침을 내놨다. 한전KPS 노조가 소속된 전력연맹은 이 과정에서 정규직 노조가 배제됐고 채용 공정성도 훼손됐다고 지적하고 있다.
정규직 노조가 문제 삼은 합의문 문구는 ‘동일가치노동-동일임금’ 원칙이다. 직고용된 하청 근로자도 기존 정규직 근로자와 동일한 처우를 받게 된다는 조항이다. 한전KPS 노조는 해당 전제 자체가 성립하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협력업체에서 8년 넘게 근무한 뒤 공개채용을 통해 한전KPS에 입사한 김성일 조장(서인천사업처)은 이날 “자격증 등 전문성을 갖추고 서류심사, 인·적성·신체검사, 면접, 신원 조회 등 단계별 채용 절차를 거친 기존 직원들과 같은 선상에서 동일노동-동일임금 원칙을 적용하자는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며 “협력업체 직원과 한전KPS 직원의 역무는 구분돼 있고 실제로 하는 일도 다르다”고 설명했다.
9년 전인 2017년 인천국제공항공사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과정에서 불거진 ‘인국공 사태’와 닮은꼴의 갈등이다. 당시 문재인 정부가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를 선언한 뒤 비정규직 보안검색요원 등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공정성 논란과 노사·세대 간 갈등이 동시에 폭발했다. 당시 정규직 노조원들은 “공식적인 채용 절차를 거치지 않은 인력이 정규직에 편입되면 승진·보직 체계가 흔들린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기후에너지환경부 관계자는 “인국공 사태 재발 우려를 충분히 고려하고 있다”며 “이번 합의가 끝이 아니라 추후 한전KPS에서 노사정 합의체를 구성해 자격요건과 경력, 실제 업무 역량 등을 종합적으로 반영한 뒤 직접고용을 추진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과거 사례를 비춰볼 때 노노 갈등은 다른 공공기관으로 더 번질 수 있다. 한전KPS뿐만 아니라 건강보험공단 콜센터 노동자들도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며 단식 농성에 나선 상황이다. 문재인 정부 때 건강보험공단도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추진했지만 정규직 노조와 젊은 세대 사원의 반발로 무산됐다. 당시 김용익 건보공단 이사장이 노노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단식농성까지 벌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정부는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에 속도를 내는 모습이다. 고용노동부는 공공부문 비정규직 실태조사에 착수했다.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처우 개선과 정규직 전환 문제 등을 논의하는 공식 기구인 공무직위원회도 관련 법안이 본회의를 통과해 곧 출범한다.
오는 3월 10일 시행되는 노란봉투법이 공공기관 노노 갈등의 불씨를 키울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공공부문은 노조 조직률이 71.7%로, 민간부문 9.8%를 크게 웃돈다. 김상민 법무법인 태평양 인사노무팀장은 “노조 조직률이 높은 만큼 노란봉투법의 가장 큰 영향을 받는 부분은 공공부문일 수 있다”며 “하청 노조는 초기에는 안전 문제를 이후에는 인건비를 요구하겠지만 결국 원청 상대로 직접고용 등까지 요구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향후 대규모 정규직 전환으로 공공기관 인건비가 급증할 경우 그 부담이 결국 국민에게 전가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한전KPS 하청 노동자들을 직접 고용하면 정원이 늘어나면서 총액인건비가 크게 확대될 전망이다. 공공기관의 인건비 증가는 재정 부담으로 이어지고, 결과적으로 국민 세금이나 전기요금 등으로 전가될 가능성이 크다는 지적이다.
박지순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모두를 정규직으로 쓰는 것이 정의로운 방향임은 분명하지만, 그동안 그렇게 하지 못했던 데에는 ‘누가 그 비용을 부담할 것인가’라는 현실적인 문제가 있었다”며 “공공기관 인건비는 결국 국민 세금과 전기료 등을 통해 국민에게 전가되는 만큼 무한정 늘릴 수 없다. 한정된 파이를 나눠야 하는 상황에서 정치권과 정부의 개입으로 절차가 흔들리면서 그 부담과 불만이 노노 갈등만 키우는 것”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