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석희(29)의 두 손이 최민정(28)의 몸에 닿는 순간, 빙판을 감돌던 8년의 냉기가 순식간에 흩어졌다. 단단하게 뻗은 심석희의 팔 근육에는 한때의 앙금 대신 동료를 향한 절실한 추진력이 실렸고, 그 힘을 고스란히 받아낸 최민정은 마치 오래된 굴레를 벗어던진 듯 얼음 위를 미끄러져 나갔다. 밀라노의 차가운 링크 위에서 벌어진 이 뜨거운 ‘푸시’는 한국 쇼트트랙이 잃어버렸던 믿음과 경쟁력을 되찾는 상징적인 의식이기도 했다.
19일(한국시간) 이탈리아 밀라노 아이스스케이팅 아레나에서 열린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여자 3000m 계주 결승. 최민정·김길리·노도희·심석희가 ‘원팀’으로 뭉친 한국은 4분04초014의 기록으로 결승선을 통과하며 8년 만에 세계 정상의 자리를 탈환했다.
‘여자 브래드버리’의 악몽과 2920일의 잔혹사 한국 여자 쇼트트랙의 두 주역, 심석희와 최민정의 관계는 잔혹극 비슷했다. 시작은 2018년 평창 대회였다. 1000m 결승에서 두 선수가 충돌해 함께 넘어진 사건은 3년 뒤인 2021년, 심석희가 당시 코치와 나눈 사적인 메시지가 폭로되며 고의 충돌 의혹이라는 메가톤급 폭풍으로 변했다.
특히 메시지 속 ‘여자 브래드버리를 만들자’는 대목은 큰 파장을 일으켰다. 스티븐 브래드버리(호주)는 2002년 올림픽 당시 앞서가던 선수들이 모두 넘어지는 바람에 어부지리로 우승한 인물이다. 우승을 막기 위해 내가 최민정과 함께 넘어지겠다는 이 표현은 그 실행 여부와 상관없이 최민정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이후 심석희는 자격정지 징계로 2022년 베이징 무대에서 지워졌고, 복귀 후에도 두 사람 사이에는 거대한 빙벽이 가로막혀 있었다. 계주에서조차 서로 살이 닿는 것을 피하기 위해 순번을 떼어놓아야 했던 불편한 동행은 한국 쇼트트랙의 전력을 갉아먹는 아킬레스건이었다.
최민정의 용단, “개인의 상처보다 국가대표의 책임이 먼저”
8년간 얼어붙었던 빙벽을 녹인 건 주장이자 피해자였던 최민정이 먼저 내민 손이었다. 최민정은 이번 대회를 앞두고 개인적인 감정은 묻어두고, 팀의 승리를 위해 심석희와의 전술적 결합을 수용했다. 지난달 밀라노 현지에서 열린 심석희의 생일 파티에 최민정이 참석해 축하하는 모습이 포착됐다. 그러면서 한국 여자 계주의 핵심이자 필승 공식인 심석희가 밀고 최민정이 나가는 '골든 조합'도 8년 만에 부활했다.
최민정은 “대표팀의 일원으로서 내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게 옳다는 판단을 내렸다”고 했다. 개인 통산 4번째 금메달을 거머쥐며 전이경(금4)과 어깨를 나란히 한 전설의 품격은 용서에서 완성됐다.
8년 만의 ‘골든 푸시’… 시상대의 거리보다 가까워진 마음
결승전 23바퀴째, 체격 조건이 좋은 심석희가 후방에서 최민정을 힘껏 밀어주는 장면은 이번 경기 최고의 하이라이트였다. 과거에는 차마 서로 닿지도 못했던 두 사람의 손과 몸이 완벽하게 밀착되어 엄청난 탄력을 만들어냈다. 심석희의 투혼 어린 푸시를 받은 최민정은 인코스를 날카롭게 베어내며 캐나다를 추월했다. 8년 전 평창에서 서로를 밀어냈던 그 손이, 이제는 서로를 밀어주는 금빛 조합으로 부활한 것이다.
경기 후 시상대에서 두 선수는 아직 조금은 멋쩍은 듯 가장 멀리 떨어져 서 있었다. 하지만 어색하게나마 서로를 향해 짓는 미소에는 8년의 세월을 견뎌온 이들만이 공유할 수 있는 이해와 연민이 담겨 있는 듯했다.
심석희는 “올림픽을 앞두고 힘든 과정이 많았는데, 동료 선수들이 잘 버텨줬다”며 참았던 눈물을 쏟았다. 최민정 역시 “서로를 믿었기에 가능한 결과였다”며 화답했다. 그 ‘서로’가 누구인지는 구체적으로 얘기를 하지 않아도 다들 안다.
밀라노의 금메달은 단순한 기록의 승리가 아니었다. 상처받은 이가 먼저 손을 내밀고, 과오를 짊어진 이가 그 손을 진심으로 밀어준 인간 승리였다. 오랜 빙벽을 허문 두 천재의 레이스는, 쇼트트랙이 단지 메달을 향한 속도전이 아니라 우리처럼 완벽하지 못한 사람들이 서로를 용서하고 화해하며 나아가는 구원과 치유의 무대가 될 수도 있다는 걸 알려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