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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속도에 지친 날, 나를 데우는 뭉근한 온도 [쿠킹]

중앙일보

2026.02.19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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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먹는 밥은 종종 대충 먹는 끼니로 여겨집니다. 하지만 혼자이기 때문에 오히려 온전히 나를 기준으로 음식을 고를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합니다.〈나를 돌보는 한 끼〉는 그런 혼밥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카페 푸드 전문가 김희경 카페시트롱 대표가 누군가를 의식하지 않고, 몸과 마음이 모두 납득할 수 있는 한 접시를 소개합니다. 첫 회는 제주 레몬 파스타입니다. 자극적이지 않고, 만들기 어렵지 않으며, 먹고 난 뒤의 기분이 가벼운 한 그릇입니다.

나를 돌보는 한 끼 ② 붉은 치킨 커리
겨울 동안 몸에 쌓였던 찬기가 천천히 빠져나가, 마음까지 따뜻해지는 메뉴로 붉은 치킨 커리를 추천한다. 사진 김희경
새해가 밝으면 세상은 약속이라도 한 듯 속도를 높입니다. 힘차게, 뜨겁게, 불의 기운으로. TV와 SNS 속 사람들은 이미 출발선을 한참 지나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 기세를 보고 있자면 아직 겨울잠에서 완전히 깨어나지 못한 제 몸과 마음은 자꾸만 이불 속으로 파고듭니다. 세상은 벌써 장작을 활활 태우고 있는데, 저는 이제 겨우 성냥 하나를 꺼내 쥔 기분입니다. 올해는 유독 그 ‘파이팅’ 넘치는 구호들이 격려라기보다 아직 제출하지 못한 숙제처럼 느껴집니다.

이런 불안을 느끼는 날이면 저는 작은 결심을 합니다. 세상의 속도를 따라가지 않기로요. 나를 밀어붙여 태우는 불 대신 안쪽부터 천천히 데워지는 불이 되기로 합니다. 오늘의 메뉴인 붉은 치킨 카레는 바로 그런 날에 만드는 요리입니다. 누구를 초대해 솜씨를 보일 일도 없고 기록으로 남길 필요도 없는 날, 오직 저라는 손님 한 명을 위해 차려지는 식사입니다.

요리를 시작하기 전, 습관처럼 쓰던 그릇 대신 혼자일 때 유난히 손이 가는 그릇을 꺼냅니다. 한 그릇 식사에 알맞은 깊이, 손바닥에 닿을 때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온기. 수저를 놓고 테이블 위에는 종이 타월 대신 깨끗한 천 냅킨을 접어 둡니다. 이 짧은 준비만으로도 식탁의 공기가 조금 달라집니다. 혼자 먹는 식사가 ‘대충’이 되지 않도록 붙잡아 주는 건 결국 이런 사소한 손길입니다.

부엌에 불을 올리면 요리의 리듬이 시작됩니다. 팬에 기름을 두르고 말린 고추와 큐민 씨드를 넣습니다. 고추가 기름에 닿는 순간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향이 먼저 몸을 깨웁니다. 양파와 마늘, 생강을 넣고 볶습니다. 불을 낮추고 시간을 씁니다. 양파가 투명해지다 천천히 색을 바꾸는 동안 저는 괜히 서두르지 않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속도를 재촉해도 이 팬 위의 양파만큼은 제 기다림의 속도로 익어갑니다. 저어주는 손목의 움직임도 자연히 느려집니다.

미리 재워둔 닭고기를 넣고 토마토를 더해 끓이다가 마지막에 코코넛 밀크를 붓습니다. 냄비 안에서 날카롭던 매운 기운이 부드럽게 풀어집니다. 붉은빛은 깊어지고 향은 한결 둥글어집니다. 억지로 끌어올린 열정이 아니라 안에서부터 천천히 차오르는 온기 같은 색입니다. 이 냄새만으로도 마음이 먼저 편안해집니다.

따끈한 쌀밥 위에 카레를 넉넉히 얹어 한 입 떠 넣습니다. 처음에는 고소함이 닿고, 이내 향신료의 열기가 은근히 따라옵니다. 이마와 목덜미에 땀이 맺히고 손끝이 서서히 따뜻해집니다. 통증 같은 매운맛이 아니라 겨울 동안 몸에 쌓였던 차가움이 천천히 빠져나가는 온도입니다. 어깨가 조금 내려가고 숨이 고르게 정리됩니다.

카레는 혼자 먹기에 참 편안한 음식입니다. 말을 하지 않아도 어색하지 않고, 속도를 늦춰도 눈치 볼 필요가 없습니다. 이 짧은 식사 시간 동안만큼은 오늘의 나를 돌보는 일에만 집중하게 됩니다. “힘내”라는 말보다 잘 끓여진 한 그릇이 주는 온기가 훨씬 직접적으로 몸에 닿는 순간입니다.

모두가 큰 불의 이야기를 쓰기 위해 바쁜 2월. 저는 작은 가스 불 앞에 서서 나만의 속도로 끓어오르는 법을 배웁니다. 활활 타오르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뭉근한 불에서 오래 달여진 한 끼가 오늘의 나를 충분히 버티게 합니다. 그릇을 비우고 따뜻해진 몸으로 의자에 등을 기대는 이 순간. 오늘은 이렇게 나를 제대로 대접했다는 감각 하나면 충분합니다.


Today`s Recipe 김희경의 '붉은 치킨 카레
붉은 치킨 커리를 만들 때 양파는 충분히 볶아 단맛을 끌어내야 한다. 사진 김희경
“양파는 서두르지 말고 충분히 볶아 단맛을 끌어내주세요. 또, 향신료는 센 불보다 낮은 불에서 천천히 향을 내야 쓴맛이 나지 않습니다.
마지막에 넣는 코코넛 밀크는 오래 끓이지 말고, 한 번 부드럽게 섞이듯 데워 마무리하세요.”

재료(2인분)
붉은 치킨 커리의 재료. 사진 김희경
닭고기 절임 : 닭 안심 200g, 플레인 요거트 2큰술, 다진 마늘 1작은술, 다진 생강 1작은술, 소금 2g, 고춧가루 1/2작은술, 큐민 파우더 1/2작은술, 고수씨 파우더 1/2작은술
카레 베이스 : 붉은 건고추 1/2개, 큐민 씨드 1/2작은술, 양파 슬라이스 100g, 다진 마늘 1/2큰술, 다진 생강 1/2큰술, 올리브오일 2큰술, 고춧가루 1/2작은술, 고수씨 파우더 1/2작은술, 큐민 파우더 1/2작은술
마무리 재료 : 토마토 1개(약 200g) 또는 토마토홀 200g, 물 1컵, 코코넛 밀크 1컵 또는 생크림 1컵, 소금, 후추, 설탕 약간씩, 생 허브 약간(고수, 이탈리안 파슬리, 바질 등)

만드는 법
1. 닭 안심에 절임 재료를 넣고 고루 섞어 1시간 이상 재워둔다.
2. 팬을 중약불로 예열한 뒤 올리브오일을 두른다.
3. 붉은 건고추와 큐민 씨드를 넣고 향이 올라올 때까지 볶는다.
4. 양파와 소금 한 꼬집을 넣고 옅은 갈색이 될 때까지 천천히 볶는다.
5. 마늘과 생강을 넣어 향을 충분히 냅니다. 탈 것 같으면 물을 아주 조금씩 더한다.
6. 고춧가루, 고수씨, 큐민 파우더를 넣고 가볍게 섞어 향을 더한다.
7. 토마토와 물을 넣고 약불에서 10분 정도 보글보글 끓인다. 틈틈이 저어준다.
8. 재워둔 닭고기를 넣고 부드럽게 익힌다.
9. 코코넛 밀크를 넣고 소금, 후추로 간을 맞춘다.
10. 신맛이 강하면 설탕을 약간 넣어 맛을 둥글게 정리한다.
11. 밥 위에 카레를 얹고 허브를 곁들여 마무리한다.

김희경 [email protected]


김희경([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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