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아웃으로 16세 때 은퇴했다가 돌아온 알리사 리우(20·미국)가 자기 만의 방식으로 올림픽 금메달을 따냈다.
리우는 20일(한국시간) 이탈리아 밀라노 아이스스케이팅 아레나에서 열린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 피겨 스케이팅 여자 싱글 프리 스케이팅에 출전했다. 쇼트프로그램 3위에 올라 뒤에서 3번째 순서로 연기한 리우는 도나 서머의 ‘맥아더파크’ 디스코 음악에 맞춰 거의 완벽에 가까운 클린 연기를 펼쳤다. 150.20점을 획득해 총점 226.79점을 기록했다.
뒤이어 일본의 사카모토 가오리(224.90)와 나카미 아미(219.16점)가 그의 점수를 넘지 못하면서, 리우는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올림픽 사라 휴스 이후 24년 만에 미국 피겨 여자선수로 금메달을 땄다. 앞서 단체전(팀 이벤트) 금메달에 이어 2관왕에 등극했다.
리우는 마지막에 머리카락을 흩날리는 포즈를 취하며 순수하고 해맑게 웃었다. 중계카메라를 향해 “바로 이게 내가 말하던 것이야”라고 외쳤다.
리우 같은 파란만장한 서사도 드물다. 13살에 미국 최연소 챔피언에 등극했던 그는 2022년 베이징 올림픽 피겨 여자 싱글 7위에 그쳤다. 코로나19 팬데믹 시절을 겪으며 아이스링크 위에 누워 ‘내가 이 스포츠에서 원하는 건 뭘까’라고 생각했다.
5살 때부터 쉬지 않고 남이 입혀준 피겨복을 입고 시키는 대로만 해왔다. 피겨스케이팅이 해야만 하는 일처럼 느껴지며 ‘번아웃’이 찾아왔다. 2022년 4월, 리우는 16세의 나이에 소셜미디어를 통해 돌연 은퇴를 선언했다.
그녀는 평범한 10대 소녀로 살기로 결심했다. 5남매 중 장녀인 그는 운전면허를 따 네 명의 동생들을 등교 시켰다. 중국 출신인 리우의 아버지는 1989년 ‘천안문 사태’가 터지자 미국으로 건너와 변호사가 됐고, 난자 기증과 대리모를 통해 5남매를 얻었는데 리우가 장녀다.
네팔 히말라야 트레킹을 떠났고, UCLA에 입학해 심리학을 공부했다. 어느 날 스키장에 갔다가 살결을 스치는 차가운 공기가 스케이트를 탈 때의 느낌과 비슷하게 여겨졌고, 자신이 스케이팅이 주는 아드레날린을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깨달았다.
복귀는 은퇴보다 더 충격적이었다. 2년간 공백기를 거쳐 2024년 돌아온 그는 이듬해 올림픽을 제외하고 가장 큰 대회인 세계선수권대회와 그랑프리 파이널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피겨계에 전례 없는 일이다.
삶을 바라보는 관점이 완전히 달라졌다. ‘완벽함’보다는 ‘행복’을 중시했고, ‘우승’을 위해서가 아니라 ‘스케이팅’ 자체를 즐겼다. 트리플 악셀(3회전 반)과 쿼드러플(4회전) 러츠를 반복하면서 생겼던 고관절 문제는 18개월간 스케이트를 타지 않은 사이에 서서히 사라졌다. 앞서 2022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ITZY의 ‘LOCO’에 맞춰 갈라 공연을 펼쳤던 리우는 플레이리스트에 ITZY, 뉴진스, 아이브(IVE) 등이 있을 만큼 케이팝도 사랑한다.
리우는 이번 올림픽을 앞두고 중앙일보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떠나고 나서야 피겨의 아드레날린을 알았다. 메달을 떠나 ‘성장이 반드시 하나의 길 위에만 있을 필요는 없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며 “내가 가졌던 휴식이 ‘포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때로는 더 큰 성장을 위해 잠시 멈추는 것이 가장 강력한 동력이 되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가장 큰 무대 올림픽에서 동화 같은 결말을 만들어냈다. 수 백만명이 TV로 지켜봤는데도 리우는 평일에 고향 오클랜드 링크에서 연습하듯 천진난만한 표정이었다. 올림픽 무대는 그저 자신이 준비한 연기, 독특한 헤어 스타일, 새롭게 맞춘 드레스를 선보일 기회일 뿐이라고 주도적으로 생각했다.
너구리 무늬처럼 한줄씩 탈색한 헤어스타일은 매년 늘어가는 나무 나이테를 의미한다. 16세 다 타버렸던 그는 20세에 더 타올랐다. 그녀는 “이렇게 큰 무대에서 제 방식대로 연기할 수 있는 게 꿈이었다”고 말했다. 그렇게 자기만의 방식으로 우승을 거머쥠으로써 멘탈을 잘 관리하면 훌륭한 일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세상에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