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중에 400만 관객을 넘어선 영화 ‘왕과 사는 남자(이하 ‘왕사남’)’를 보러 가자고 했더니, 아내는 단호하게 거부했습니다. 예전에 영월 여행을 간 적이 있는데, 그때 단종이 유배되어 살던 청령포에 들어서기만 했는데도 단종이 불쌍해서 눈물이 나더라는 겁니다. 결말을 뻔히 아는 이상, 그 슬픈 이야기를 보고 싶지 않다는 이야기더군요.
그래서 혼자 영화를 보는데, 무엇보다 엄흥도 역을 맡은 유해진의 기막힌 연기에 웃었다 울었다를 반복할수밖에 없었습니다. 요즘도 서울에서 영월을 가려면 도중에 깊은 산과 거센 물을 반복해서 만나게 됩니다. 단종과 엄흥도의 시절엔 그야말로 벽지였겠죠. ‘왕사남’은 그런 벽촌의 촌장 엄흥도가 ‘한양에서 유배 오는 귀인을 유치해 보자’고 나섰다가 폐위된 단종(박지훈)을 맞고, 그의 처지에 차츰 공감해가는 이야기를 설득력있게 그리고 있습니다.
어린 단종이 숙부 수양대군에게 쫓겨나 쓸쓸하게 죽어갔다는 옛 이야기는 모르는 사람이 없죠. 그런데 왜 지금, 영화 ‘왕사남’이 설 연휴 화제를 모으며 흥행 선두를 달리고 있을까요. 게오르그 루카치가 “역사소설의 미덕은 현대의 전사를 설명해주는 데 있다”고 했듯, 좋은 사극은 그 시대의 의상을 입은 사람들을 통해 오늘날의 이야기를 하고 있기 마련이죠. 저는 문득 수많은 관객을 끌어들인 감동의 원천은 바로 ‘민초의 의리’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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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공 단이라는 인물의 의미
조선은 유학의 나라입니다. 공자의 가르침을 생명처럼 여기는 사대부들이 세웠고, 왕 또한 사대부의 한 사람이며, 왕이 뭐라 해도 옳은 것은 옳다, 그른 것은 그르다고 말하는 선비들의 절의로 지켜온 나라라는 것이 조선이라는 나라의 근본 이념입니다.
여기서 공자가 이상적인 인간의 표상으로 삼은 주공 단이라는 인물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공자의 시대보다 약 600년 전, 중국 주나라 무왕의 아들 성왕이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을 때, 무왕의 동생인 주공은 스스로 섭정이 되어 선정으로 나라를 안정시켰습니다. 그리곤 조카 성왕이 성인이 되자 바로 권력을 반환하고 물러났죠. 공자는 그의 사심없는 행동을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행위의 모델로 보고 존경했습니다.
흥미롭게도 이 주공 단과 성왕의 관계는 수양대군과 단종의 관계와 일치합니다. 단종이 왕위에 오르고 1년 뒤인 1453년, 수양대군은 동생 안평대군과 김종서, 황보인 등을 제거하고 스스로 영의정, 이조판서, 병조판서를 겸직합니다. 이것이 계유정난인데, 이때까지만 해도 수양대군의 대외적 명분은 ‘간신을 토벌하고 조선의 주공 단이 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뒷날 사육신의 한 사람인 성삼문은 자신을 고문하는 세조를 향해 “늘 주공 주공 하더니 주공이 어디서 이런 무도한 행동을 했느냐”고 꾸짖었다고 전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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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는 영락제를 모방했다... 조카에게 내린 사약
하지만 수양대군의 속마음은 주공이 아니라 명나라 영락제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불과 50여년 전, 명나라 영락제는 조카 건문제를 내쫓고 명나라 3대 황제가 되었는데, 2년 전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수양대군은 그 과정을 충분히 숙지하고 있었던 거죠.
결국 단종에게는 숙부에게 양위하라는 간신들의 압력이 쏟아지고, 그렇게 수양대군이 세조로 즉위하고, 여기 반발한 사육신의 음모가 적발되고, 이 ‘반란’을 계기로 세조는 상왕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등해 멀리 영월로 유배보냅니다. 하지만 바로 4개월 뒤, 세조가 보낸 사약이 도착하죠. 영화 ‘왕사남’은 그 4개월 동안 단종과 엄흥도 사이에서 있었을법한 이야기를 사실과 상상을 섞어 그려내고 있습니다.
단종에게 내린 사약은 매우 극단적인 조치입니다. 흔히 조선의 ‘쫓겨난 왕’이라면 연산군과 광해군을 떠올리게 되는데, 폭정으로 공분을 산 두 사람 모두 천수를 누렸습니다. 비록 폐주라 해도 왕을 죽일 수는 없다는 이유였죠. 이것은 역설적으로, 그만치 세조는 단종을 동정하는 민심을 두려워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흥미롭게도 영화 ‘왕사남’에는 수양대군, 즉 세조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수양대군의 오른팔인 한명회(유지태)가 모든 악행을 저지르는 핵심 인물로 나오죠. 그런데 정작 중요한 이야기는 그 한명회 뒤에 숨은 대신들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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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트들의 배신, 민초의 의리
많은 사람들은 한명회와 몇몇 사람들은 세조의 악행에 동조했지만, 세종이 키워낸 집현전의 충신들은 단종을 위해 죽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의 절반만 본 시각입니다. 집현전 출신의 인재들 중 성삼문과 박팽년 등은 절의를 지켰지만, 역시 집현전의 주축이었던 신숙주, 정인지, 최항, 김질, 정창손 등은 눈 앞의 권력에 협력했습니다. 이들 외에도 조정 가득한 유교 엘리트들이 세조의 만행을 방관했습니다.
반면 영화 속 엄흥도와 동네 사람들은 단종에 대한 동정과 의리를 버리지 않습니다. 정치는 몰라도, 인간의 도리는 선명했던 것이죠. 기록에 따르면 엄흥도는 ‘역적의 시체를 거두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엄한 명령에도 밤에 몰래 묘를 만들고 단종의 시신을 모셨습니다. 뒷날의 우암 송시열도 “충렬지사가 어찌 명문가에서만 나온단 말인가. 당시 임금을 팔아 제 몸의 이익을 찾던 자들과 엄흥도를 비교해 보라”고 기린 바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만 더 기록을 살펴보면 숨겨진 영웅은 엄흥도 한 사람이 아닙니다. 단종 사후 60년째인 1516년, 중종은 사람을 보내 단종의 묘를 찾아 제사를 지내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현장을 다녀온 보고 내용을 보면 ‘많은 무덤 중 하나였지만, 마을 사람 모두 임금의 묘라 불러 어린아이도 알 수 있었다(衆塚蕞于傍. 邑人稱之爲君王墓, 雖孩幼, 亦能識別)’고 합니다. 그러니까 영월 사람들은 누가 시신을 묻었는지, 어디에 묻었는지 다들 알고 있었지만 누구 하나 그 사실을 고변하지 않고 보호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대단한 의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평소 입으로는 인의를 외쳤지만 막상 필요할 때 권력 앞에 엎드리고 정도를 외면해버린 사대부들, 그리고 비록 배운 것 없지만 인간이라면 그럴 수 없다는 대의에 충실했던 영월 사람들. 대한민국이 원칙에 따라 움직이는 나라이길 바랐던 오늘날의 보통 사람들과, 2년 전 일국의 각료란 위치에서도 권력자의 '내란'을 제지하지 않았던 이 나라의 최고 엘리트들이 절로 겹쳐 보입니다.
‘왕사남’을 보러 극장을 찾은 사람들은 무엇을 보았을까요. 권력의 부당한 명령에 굴종하며 누릴 것은 다 누리던 이들에 대한 분노를, 어려운 상황에서도 의리를 지킨 사나이 엄흥도의 모습을 보고 해소하는 것은 아닐까요. 세계정치학회(IPSA) 전현직 회장단이 ‘대한민국 국민’을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했다는 뉴스가 있었습니다. 여전히 ‘왕사남’을 찾는 관객이 끊이지 않는 것은 이런 이유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