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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시선] Trump World(트럼프 세상)

연합뉴스

2026.02.21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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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시선] Trump World(트럼프 세상)

(워싱턴=연합뉴스) 홍정규 특파원 = 서울 여의도는 한국의 정치·금융 중심지로 불릴 만하다. 국회의사당과 금융기관들이 밀집해 미국으로 치면 워싱턴 DC와 뉴욕 월가를 합친 듯한 공간이다. 여의도 동쪽 끝자락에 두 개의 고층 빌딩 단지가 있다. 고급 주상복합 건물인 '트럼프 월드(Trump World)Ⅰ'과 '트럼프 월드Ⅱ'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일가족의 직접 소유는 아니고, 부동산 재벌인 트럼프 그룹이 전 세계에서 로열티 등을 받고 이름을 빌려준 일종의 프랜차이즈라고 한다.
직역하면 '트럼프 세상'이 된다. 미국이 추구하는 '팍스 아메리카나'의 트럼프식 버전이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던 팍스 로마나의 현대판 같다. 당시에는 로마 제국이 세계, 보다 정확히는 서구 문명지인 유럽과 중동을 호령했다. 지금 미국은 서반구 전체가 사실상 자기 영역이라는 깃발을 꽂았다. 또 덴마크에 그린란드를 내놓으라던 사례에서 보듯, 유럽과 아시아의 동맹국들은 노골적으로 아랫사람처럼 취급한다. 그리고 미군의 공격 임박 조짐이 거론되는 이란은 '적국'이다. 이란은 로마 제국의 숙적이던 파르티아 왕국의 후예다.
동서고금을 막론한 국제정치의 냉엄한 현실은 무엇보다 힘이 우선이라지만, 미국은 대놓고 완력을 과시한다. 무소불위 일방통행이다. 대국(大國)의 명분이나 체면 따위 아랑곳하지 않는 듯한 행보가 불과 1년 만에 '뉴노멀'처럼 됐다. 그 단적인 면모는 관세 정책에서 유감없이 드러난다. 무역에서 적자를 본다는 이유로 자유무역협정(FTA)을 무시한 채 수십 %의 관세를 매겨 생산기지 이전을 사실상 강제하고 수천억 달러의 투자 약정을 하게 했다. 경제·안보상 대미(對美) 의존도가 큰 한국이 그 앞줄에 설 수밖에 없었다는 점은 주변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온갖 고초를 겪은 우리 현대사의 서글픈 한 페이지 같다.
'10%+α'의 상호관세가 연방대법원에 의해 '권한 남용'이라는 판단을 받고 무효가 되자, 트럼프 대통령은 3시간 만에 기자회견을 열어 그 효과에 버금갈 '글로벌 관세' 부과를 선언했고, 그로부터 5시간 만에 서명했다. 이는 그로부터 약 사흘 뒤 발효한다.
위법 판결 가능성을 예견하고 미리 준비한 듯 속전속결식이었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이전보다 더 많은 돈을 걷을 것"이라면서, 이미 '불법 수금'이 된 200조원대 관세 환급은 어찌 될지 모르겠다고 한다. 상호관세를 고무줄 잣대로 매겼다가 선심 쓰듯 낮춰주는 대가로 천문학적 대미 투자, 미국산 제품 구매, 시장 개방 등을 얻어간 무역협상은 "대다수 유효하다"고 못 박았다. 학창 시절 골목대장이 따로 없다. 그야말로 온 지구가 '자기 세상'이다.
다시 여의도로 시선을 돌려 보자. 한국의 권력과 돈이 집중된 곳에 높이 솟은 건물 이름이 소유·거주자들에게 어떻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 명칭이 주는 페이소스가 요즘만큼 짙은 적이 있을까. 트럼프 월드Ⅰ·Ⅱ 두 건물의 존재(트럼프 대통령이 정치에 본격 데뷔하기 전인 2000년 전후에 지어졌다)가, 물론 그럴 리 만무하지만, 트럼프 1·2기 행정부와 묘하게 겹치는 느낌에 더욱 쓴웃음이 난다. 트럼프 월드Ⅲ는 여의도가 아니라 용산에 있다. 한때 그곳에 터 잡았던 전직 대통령은 시대착오적 비상계엄으로 권좌에서 쫓겨나 얼마 전 1심에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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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정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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