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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역사 이끈 할아버지의 나무 표지판…GOAT 반열 오른 6관왕 클레보

중앙일보

2026.02.21 21:44 2026.02.21 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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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계올림픽 사상 첫 단일대회 6관왕의 위업을 이룬 요한네스 클레보. 로이터=연합뉴스
할아버지는 외손자의 재능을 일찌감치 알아봤다. 2세 무렵 유아용 스키 세트를 선물로 사주고 틈만 나면 눈 위에서 놀게 했다. 6~7세 무렵 지역 스키대회에서 우승하자 “너는 언젠가 세계챔피언이 될 수 있다”며 더 큰 꿈을 품게 했다. 지고 돌아온 날은 “오늘은 이기지 못 했지만, 중요한 걸 배운 날이다. 졌다는 건 더 빨라질 기회가 생겼다는 뜻”이라며 따뜻하게 안아줬다.

할아버지는 코치이자 멘토이자 훈련 파트너 역할까지 도맡았다. 믿음직한 조력자와 함께 하며 일취월장한 외손자는 ‘스키를 신고 태어난다’는 노르웨이에서 크로스컨트리 스키 선수로 군계일학의 자리에 올랐다. 20세 때 국제스키연맹(FIS) 크로스컨트리월드컵 종합 우승을 달성하며 할아버지의 입버릇처럼 세계 챔피언이 됐고, 이후 동계올림픽 역사를 새로 썼다.

크로스컨트리 스키의 절대 강자 요한네스 클레보(29·노르웨이)가 겨울 종목 GOAT(역대최고선수·Greatest of All Time)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21일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 남자 크로스컨트리 스키 50㎞ 매스스타트 클래식 경기에서 2시간6분44초8의 기록으로 가장 먼저 결승선을 통과해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대표팀 동료 마틴 뢰브스트룀 니엥게트를 8초9 차이로 제쳤다.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 크로스컨트리 스키 6관왕에 오른 노르웨이의 요한네스 클레보의 어린 시절. 사진 클레보 인스타그램
이 종목 우승과 함께 클레보는 이번 대회 6관왕에 올랐다. 앞서 출전한 10㎞+10㎞ 스키애슬론, 스프린트 클래식, 10㎞ 인터벌 스타트 프리, 4×7.5㎞ 계주 단체전, 팀 스프린트 등 다섯 종목도 모두 금빛으로 장식했다. 한 대회에서 6개의 금메달을 거머쥔 건 지난 1980년 레이크플래시드 대회에서 미국 빙속의 전설 에릭 헤이든이 세운 동계올림픽 단일대회 최다 금메달 기록(5개)을 뛰어넘은 새 역사다. 아울러 역대 최초로 단일대회 크로스컨트리 스키에 달린 6개의 금메달을 모두 석권하는 기록도 세웠다.

단거리와 중장거리를 가리지 않고 압도적인 경기력을 선보이는 비결은 ‘클레보 런(Klæbo run)’이라 부르는 독특한 주법에 있다. 통상적으로 크로스컨트리 스키 선수들은 경기 중 스트라이드(보폭)를 최대한 넓히고 딛는 발에 체중을 실어 글라이딩(미끄러지듯 전진하는 것)한다. 체력소모를 최소화하기 위한 방식이다.

클레보는 다르다. 보폭을 상대적으로 좁히는 대신 발걸음 수를 더 많이 가져간다. 이와 같은 방식의 주법은 업힐(오르막) 구간에서 위력을 발휘한다. 속도가 줄어드는 대부분의 선수들과 달리 클레보는 짧고 강하게 반복해서 치고 나가 고속 질주를 유지한다. 아울러 레이스 대부분을 90% 안팎의 체력 강도로 주파한 뒤 마지막 200m 정도를 남기고 남은 힘을 쥐어짜내 폭발적인 가속으로 경쟁자들과의 거리를 벌린다.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 크로스컨트리 스키 6관왕에 오른 노르웨이의 요한네스 클레보(왼쪽)와 스승이자 멘토로 활동한 외할아버지 아르네 회스플로트. 사진 클레보 인스타그램
클레보 만의 독특한 주법과 전략은 코치로 그와 평생을 함께 한 외할아버지(아르네 회스플로트)가 완성했다. 회스플로트는 성장기 클레보를 가르치며 3㎞를 일정한 속도로 질주한 뒤 마지막 300m를 전력 질주하는 방식의 훈련을 무한 반복했다. 훈련을 마칠 때면 함께 이용한 동네 크로스컨트리 스키장 도착 지점에 있던 나무 표지판을 놓고 ‘누가 먼저 찍나’로 외손자와 내기를 했는데, 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경쟁심을 북돋웠다. 클레보 런과 막판 200m 질주 등 그만의 경기 스타일은 당시의 훈련 방법을 변형·개선한 형태다.

클레보는 “할아버지의 방식이 주먹구구식이거나 가학적이었던 건 아니다”면서 “할아버지는 매일 빠짐없이 훈련 일지를 썼고, 내 심장 박동 데이터를 엑셀 파일로 꼼꼼히 정리해 무리하지 않게 조절했다”고 말했다. 앞서 지난 2022년께 훈련 방식 문제로 대표팀 코칭스태프와 갈등을 빚을 때도 클레보는 할아버지와의 개인 훈련을 선택했다.

클레보가 동계올림픽에서 거머쥔 금메달은 통산 11개에 이른다. 2018년 평창대회 3관왕, 2022년 베이징 대회 2관왕에 이어 이번 대회 6관왕으로 무결점 경기력을 선보였다. 동·하계 올림픽을 통틀어 클레보보다 많은 금메달을 보유한 선수는 미국의 수영 영웅 마이클 펠프스(23개) 뿐이다.

6관왕을 달성한 뒤 환호하는 클레보. AFP=연합뉴스
6관왕에 오른 직후 클레보는 “어린 시절부터 품어왔던 꿈이 현실이 됐다”면서 “지난해 세계선수권대회를 치르며 ‘올림픽 전종목 석권’이라는 목표를 가슴에 품었다. 어려운 도전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보니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감격스럽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어 “이번 대회 성과는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나를 가장 오래 믿고 응원해 준 할아버지의 업적이기도 하다”면서 “그는 평생 나를 위해 헌신했고, 그 모든 노력이 올림픽 금메달이라는 열매를 빚었다”고 덧붙였다.



송지훈([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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