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연방대법원이 ‘관세 폭주’에 제동을 걸었지만, 불확실성은 되려 커졌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곧바로 새로운 관세 카드를 꺼낸 가운데 위법을 피해갈 수단까지 동원하기 시작하면서다. 바닥을 딛고 되살아나는 조짐이 있던 한국 경제에도 다시 비상등이 켜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21일(현지시간) 자신의 소셜미디어를 통해 “글로벌 관세(Worldwide Tariff) 10%를 허용된 최대치이자 법적으로 검증된 15% 수준으로 올리겠다”고 밝혔다. 하루 만에 글로벌 관세를 5%포인트 더 올리겠다고 방침을 바꿨다. 앞서 미국 연방대법원은 트럼프 대통령이 국제비상경제권한법(IEEPA)에 근거해 각국에 부과한 상호관세 조치를 위법하다고 판결했다. 트럼프식 관세 전면전에 제동을 걸고 나선 것이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정책 방향을 틀 가능성은 희박하다. 우회로가 충분하다는 판단에서다. 실제로 트럼프 대통령은 대법원 판결 후 바로 전 세계에 ‘글로벌 관세 10%’를 부과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무역법 122조에 근거한 것으로 기존 상호관세를 대체하는 성격이다. 이어 관세율도 법이 정한 최대치인 15%까지 끌어올렸다. 무역법 122조 행정명령은 150일간 관세를 부과할 수 있고, 연장하려면 의회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일단 150일이란 시간을 벌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향후 몇 달 안에 새롭고 법적으로 허용되는 관세를 결정하고 발표할 것”이라고 밝혔다. 관세 카드를 얼마든지 쓸 수 있다는 압박이다. 구체적으로 무역법 301조, 무역확장법 232조 등이 거론된다. 무역법 301조는 외국의 불공정 무역 관행을 조사한 뒤 보복 관세를 부과하는 제도다. 이와 관련해 제이미슨 그리어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는 대법원 판결 직후 “대부분의 교역국을 대상으로 무역법 301조에 대한 조사를 시작할 것”이라고 밝혔다.
품목 관세를 강화할 가능성도 있다. 특정 품목의 수입이 국가 안보를 위협한다고 판단될 때 관세를 부과하는 무역확장법 232조를 활용하는 방안이다. 이미 미국은 이를 근거로 철강∙자동차 등에 15%의 품목별 관세를 부과하고 있다. 반도체도 해당 법에 따른 관세 부과 대상으로 분류된 상태다. 한국의 주력 수출품 대부분이 품목 관세의 사정권에 있는 셈이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실장은 “만약 품목 관세 국면으로 넘어간다면 상호관세보다 마이너스가 될 수도 있다”고 전망했다.
한국 경제가 지난해 하반기부터 미약하나마 회복 조짐을 보이는 건 대부분 수출 덕이다. 반도체 수퍼 사이클 효과로 수출 증가세는 올해도 이어지고 있다. 1월만 해도 수출액이 658억5000만 달러로 전년 동기 대비 33.9% 늘었다. 정부가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2.0%로 높여 잡은 배경이기도 하다. 품목 관세에 대한 불확실성이 커지고 수출이 둔화하면 성장 목표 달성에도 적신호가 켜질 수밖에 없다.
물론 희망적인 측면도 있다. 최근 한국은 대미투자특별법안 처리 지연 등을 이유로 ‘관세를 25%로 다시 인상하겠다’는 미국의 압력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위법 판결과 함께 일시적이나마 이런 부담 또한 사라졌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효과가 되살아날 여지도 있다. 한국무역협회는 22일 보도참고자료를 통해 “미국 관세 구조가 글로벌 관세 15%에 최혜국대우(MFN) 관세를 더하는 방식으로 바뀔 전망”이라며 “한·미 FTA의 MFN 관세 면제 효과만큼 가격 경쟁력 우위를 일부 회복할 여지가 있다”고 설명했다.
현실적으로 트럼프의 폭주를 멈춰 세울 수 있는 건 법원이 아닌 유권자가 될 거란 분석도 나온다. 대법원의 위법 판결 나온 만큼 오는 11월 열리는 미국 중간선거는 트럼프의 관세 노선에 대한 국민투표 성격을 띨 가능성이 있다. 이달 12~17일 ABC뉴스와 워싱턴포스트(WP), 여론조사기관 입소스가 미국 성인 2589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64%는 트럼프 대통령의 수입품 관세 정책에 대해 ‘지지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현재 공화당은 상∙하원에서 근소하게 민주당을 앞서고 있다.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패배하고, 다수당 구도가 역전된다면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카드는 사실상 동력을 잃을 수 있다. 한 전직 통상 관료는 “미국 내부의 이슈에서 출발한 만큼 한국이 서두르거나 선제적으로 움직일 필요는 없다”며 “달리 생각하면 중간선거 때까지 트럼프의 압박이 더 거세질 수 있는 만큼 신중하고 전략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트럼프 행정부가 이행 압박을 줬던 ‘대미(對美) 투자’는 일단 계획대로 진행하는 것으로 가닥이 잡혔다. 한국이 미국에 3500억 달러(약 507조원)의 규모의 투자를 하기로 했지만, 상호관세 자체가 무효가 된 만큼 투자 합의도 무효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이 때문에 일각에선 투자 계획을 재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다만 한국이 먼저 재협상을 요구하기는 어렵다는 게 중론이다. 행정부 리더십이 바뀐 건 아닌 데다 이번 투자가 조선업이나 핵추진 잠수함 등 양국의 전략적 합의와 맞물려 있는 점도 고려할 대목이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한국이 대미투자를 하지 않으면 15%로 내렸던 관세를 미국이 25%로 다시 올린다는 상황은 바뀐 게 없다”고 말했다.
이에 정부는 21일 위성락 청와대 국가안보실장과 김용범 정책실장을 중심으로 대미통상현안 관계부처회의를 열고 대미 투자를 기존 계획대로 진행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연방대법원 판결 직전 박정성 산업통상부 차관보를 단장으로 하는 실무단은 미국 워싱턴DC를 찾아 상무부 등과 대미 투자 실무 협의를 진행했다. 국회 대미투자특별위원회도 예정대로 오는 24일 입법공청회를 개최하고, 특별법 제정을 위한 절차를 변함없이 진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