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현지시간) 이탈리아 밀라노 대성당 앞에서 만난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 2관왕 김길리(22)는 동메달까지 메달 3개를 목에 걸고 등장했다. “정말 무겁다”며 활짝 웃는 그에게 람보르기니 미니카를 선물하자 또 한 번의 사랑스러운 눈웃음이 돌아왔다.
이름은 음양오행에 맞춰 도라지 ‘길’에 마을 ‘리’를 쓰는 김길리의 별명은 이탈리아 수퍼카에 빗댄 ‘람보르길리’다. 3~4년쯤 성남의 재활 선생님이 붙여준 별명은 전세계적 고유명사가 됐다. 글로벌 스포츠매체 ESPN도 “장난스러운 별명 람보르길리. 결승전에 보여준 스피드는 장난이 아니었다”고 표현했다.
하루 전 쇼트트랙 여자 1500m 결승에서 그는 별명처럼 수퍼카 같은 질주를 보여줬다. 마지막 3바퀴를 남기고 최민정(28)이 인코스, 김길리가 아웃코스를 질주하며 동시 추월했다. 김길리가 가속 페달을 밟듯 최민정까지 추월하고 금메달을 따면서, 전설의 시작을 알리는 길이 남을 명장면을 만들어냈다.
시상식은 새로운 여제의 대관식 같았다. 스노보드 최가온이 롤모델 클로이 김(미국)을 넘어섰듯, 김길리가 ‘여제’ 최민정의 왕관을 물려받는 장면을 떠오르게 했다.
김길리는 “전설은 게임에서나 들어봤던 단어다. 민정 언니랑 꼭 포디움에 같이 올라가고 싶었다”면서도 “마음이 뭔가 이상하다. 언니에게 (2030년) 알프스 올림픽에 같이 가자고 말해보고 싶은 심경”이라고 했다. 김길리는 12년 전 초등학생 때 수줍게 함께 사진을 찍은 최민정을 롤모델로 삼았다. 최민정도 자기를 존경하는 후배가 스케이트를 잘 타니 진심으로 예뻐하고 조언을 해준다고 한다.
올림픽 기간 중 김길리는 부친 김선호씨와 수시로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지난 18일 여자 3000m 계주에서 첫 금메달을 따낸 뒤 ‘장하다 우리 딸’이라는 아빠의 메시지에 그는 “꺄아아악~ 미쳐따요(감탄하는 신조어)”라며 발랄한 답장을 보냈다.
16일 여자 1000m 동메달 직후엔 아빠의 격려에 “예썰. 굿굿”이라고 화답했다. 20일 여자 1500m 우승 땐 “감사합니다 ㅠㅠㅠㅠ”라며 꼭꼭 숨겨둔 감정을 살짝 드러냈다. 당일 최민정의 은퇴 발표 소식을 접한 그는 취재진에 “진짜요?”라고 반문하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밀라노에서 만난 김선호씨는 “길리가 어린 시절부터 최민정을 롤모델로 삼아 훈련에 매진했다. 우상이 태극마크를 내려놓는다는 소식에 많이 슬퍼했다”고 귀띔했다.
알려지지 않았지만 김길리는 올림픽 기간에 남모를 속앓이를 했다. 지난 10일 혼성계주 2000m에서 미끄러진 코린 스토더드(미국)와 정면충돌해 고꾸라지면서 펜스에 강하게 부딪혔다. 김선호씨는 “길리가 처음에는 갈비뼈를 만지더라. 금이 갔다면 올림픽을 아예 뛸 수 없었을텐데 다행이었다. 다만 실제로 넘어진 이후 컨디션이 안 좋아졌고, 크게 넘어져 트라우마가 생길 수도 있었다”고 전했다.
김씨는 “길리가 넘어지고 난 뒤 500m 종목에서도 속도가 너무 안 나오자, (스케이트) 날에 대한 신뢰가 떨어졌다. 원래 금색날 4개를 맞춰왔는데, 소속팀(성남시청)에서 다른 종류의 날을 공수해와 바꿔 끼웠다. 뒤에서 타면서 최적의 날을 찾았고, 1000m 동메달이 금메달 2개를 딴 계기가 됐다”고 전했다.
김길리는 “넘어졌어도 내 실력은 죽지 않았으니까 저 자신을 믿고 탔다. 계산하기보다는 속도가 될 때 추월했다”고 했다. 혼성계주에서 충돌 피해를 입혔지만 1500m 동메달을 따 시상대에 함께 오른 스토더드와는 “영어로 축하한다는 대화를 주고 받았다”고 했다.
우승 장면에서 김길리는 양손 엄지와 검지, 새끼손가락을 함께 펴는 시그니처 동작을 선보였다. 김길리는 “저만의 느낌대로 세리머니를 했다. 이걸 할 때면 잘 탄 기분이 있어서 시그니처로 만들었다”고 했다. 그가 응원하는 프로야구 KIA 타이거즈의 간판 스타 김도영의 세리머니와 닮았다. 앞서 KIA 홈경기 시구자로도 나선 그는 귀국 후 팬들과 KIA 경기를 보러 가는 게 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