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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중앙] 탄성이 절로 나와요, 그림자를 예술로 만드는 발견의 순간

중앙일보

2026.02.22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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쨍한 햇볕이 비스듬히 기울어질 때 바닥에 길게 늘어진 그림자를 본 적 있을 겁니다. 걷고 있는 사람의 그림자는 때론 거인처럼 보이는가 하면, 가로등 아래 지나가던 길고양이의 그림자는 실제보다 더 위협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죠. 이처럼 사물과 빛이 만나 생기는 그림자는 예상치 못한 장면을 만들며 실제보다 더 많은 상상을 불러일으킵니다. 벨기에 출신 작가 겸 영화감독 빈센트 발은 이런 현실과 상상의 경계가 흐려지는 찰나의 순간을 다양한 작품으로 나타내죠.
컵 그림자로 평화로운 해변을 연출한 작품 ‘아일 로브 쉐도우’.
펜으로 정교한 그림을 그리기보다 우연히 생긴 그림자를 관찰하는 빈센트 발은 컵 손잡이가 벽에 드리운 그림자, 숟가락이 만들어낸 어색한 곡선, 스탠드 불빛 아래 놓인 일상의 물건 등에 몇 개의 선을 더해 전혀 다른 장면을 만들어 냅니다. 컵 그림자는 코끼리의 코가 되고, 안경 그림자는 사람의 얼굴이 되며, 전구 아래 생긴 실루엣은 동화 속 주인공으로 변해요. 유리잔·포크·과일 등 평범한 일상의 사물에 빛을 비춰 만들어진 그림자를 활용해 독창적인 예술 작품을 탄생시키는 빈센트 발은 자신의 작업을 단순히 '창작'이 아닌 '발견'의 산물이라며 이를 '그림자학(Shadowology)'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그림자를 하나의 언어이자 이야기의 출발점으로 정의한 그는 평범한 사물의 그림자에서 흥미로운 부분을 찾아 동시대 사람들의 공감대를 끌어내며 주목받아요.

빈센트 발의 기발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전시 '빈센트 발: 쉐도우그램(SHADOWGRAM)'이 오는 6월 14일까지 서울 송파구에 있는 뮤지엄(MUSEUM) 209에서 열려요. 한국 전시를 위해 특별 기획된 비공개 신작들과 함께 그림자 속에 숨겨진 무한한 빛과 상상의 세계가 총 10개 섹션으로 펼쳐집니다. 만화 캐릭터 '스머프' '땡땡'의 고향인 벨기에 출신답게, 그의 작품은 아기자기하고 만화적인 감성을 띄고 있다고 평가받죠. 시시한 말장난 같은 제목들은 언뜻 가벼워 보이지만, 이는 마르셀 뒤샹 등이 즐겨 사용했던 언어유희와 일맥상통하며 보는 이들에게 상상력을 불러일으켜요. 첫 번째 섹션은 평범한 사물을 빛 속에서 유심히 탐색하고 '그림자가 남긴 한 컷'에 자신만의 독창적인 유머와 위트 있는 상상력을 더해 작품을 완성하는 과정을 영상으로 보여줘요. 그의 즐거운 발상을 영상으로 보는 내내 관람객은 자연스레 미소를 띠게 되죠.
영화 ‘스타워즈’ 시리즈 제다이 기사 요다와 네덜란드 유명한 치즈 ‘고다’가 대치하는 작품 ‘요다 vs 고다’.
그림자는 빛을 받는 각도와 거리의 변화에 따라 같은 물건이라도 전혀 다른 형태를 만들어 내는데요. 그림자의 기본적인 형태와 구조를 통해 상상이 어떻게 시작되는지 두 번째 섹션에서 그 여정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먹는 대파 그림자로 만든 작품 '파격(Leek Chic)'이 관람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아요. 가끔 요리하다가 햇살이 들어오면 손질하던 채소 중 하나가 아주 멋진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걸 목격한다는 빈센트 발은 재빨리 펜과 종이를 들고 엉뚱한 그림자 생명체를 영원히 남긴다고 해요. 그 결과물이 세련된 대파 신사 '파격'이고요. 공구 그림자를 이용한 작품 '조여오는 슬픔'은 그림자 주위에 생겨나는 흰 여백, 네거티브 스페이스(Negative space) 공간을 재치 있게 구성한 작품이에요. 집에서 수리하던 빈센트 발은 여기저기 흩어진 공구 가운데 오래된 펜치 한 쌍을 발견해 두 명의 여인을 탄생시켰죠. 한 명은 내향적이고 또 다른 한 명은 외향적이지만 둘 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자기만의 멋을 지닌 여인들을 그려냈습니다.
그림자의 존재를 통해 우리 삶의 모습과 감정을 이야기하는 빈센트 발의 작품 ‘피셔우먼즈 프렌드’.
세 번째 섹션 ‘아이콘 오브 쉐도우(ICONS OF SHADOW)’에서는 우리가 잘 아는 인물과 캐릭터들이 사물의 그림자와 간단한 선을 통해 예상치 못한 모습으로 등장해요. 빈센트 발은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이미지를 선택함으로써, 관람객이 그림자를 읽는 순간의 즐거움과 공감을 극대화했죠. 익숙한 인물일수록 그림자로 표현됐을 때의 반전은 더욱 강렬해져요. '요다 vs 고다'는 그림자가 단순한 실루엣을 넘어 기억과 문화, 그리고 세대를 연결하는 시각적 언어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예입니다. 네덜란드로 휴가를 간 빈센트 발은 렌트한 별장에서 치즈 슬라이서를 발견하고 곧바로 다양한 그림자를 만들었죠. 그러다 영화 '스타워즈'의 광선검을 만들 수 있다는 걸 알게 됐고요. 유명한 네덜란드 치즈인 '고다(Gou-da)'가 '스타워즈' 속 제다이 기사 '요다(Yoda)'와 발음이 비슷하다는 걸 깨달은 그는 치즈 슬라이서 그림자를 이용해 요다와 고다가 대치하는 모습을 유쾌하게 표현했습니다.

그림자를 공간 속에서 직접 경험하는 설치 작품을 만날 수 있는 ‘인스톨레이션(INSTALLATONS)’에서 관람객은 작품을 보는 데 그치지 않고 전원을 직접 켜고 끄는 행위를 통해 그림자를 만들거나 사라지게 하며 작품의 변화를 스스로 완성하게 됩니다. 빛이 켜지는 순간 그림자는 등장하고 빛이 꺼지면 이미지 또한 사라지죠. 이 단순한 조작 속에서 빛과 그림자, 존재와 부재의 관계를 직접 체험하게 됩니다. 이 공간에서 그림자는 고정된 결과물이 아니라 관람객의 선택과 행동에 따라 끊임없이 달라지는 살아 있는 예술로 존재하죠. 빈센트 발이 그림자를 이용해 작품 활동을 하게 된 계기도 이 섹션에서 만나볼 수 있어요. 2015년 베트남에서 찻잔을 산 그는 영화 시나리오 작업 중 찻잔 속에 작고 귀여운 코끼리가 숨겨져 있다는 걸 깨달았고 그 코끼리 그림자에 눈과 다리, 미소를 그려 페이스북에 올렸어요. 엄청난 반응을 겪은 빈센트 발은 그 후 지금까지 그림자학 작업을 이어오며 “이 찻잔 덕분에 나는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다”고 했죠.
 색이 있는 컵을 이용해 바다 풍경을 완성한 빈센트 발의 ‘긍정적으로 세상을 ’바다‘ 보세요’.
다섯 번째 섹션은 오브제가 지닌 고유한 색이 그림자를 통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는 작업으로 구성됐어요. 빛을 통과하거나 반사한 색은 단순한 형태의 그림자에 깊이와 감정을 더하며 오브제의 존재감을 한층 더 부각해요. 빈센트 발은 색을 장식이 아닌 표현의 핵심 요소로 사용하고요. 오브제의 컬러는 그림자 속에서 확장되고 변주되며, 그림자는 더 이상 어둠이 아닌 색을 담아내는 또 하나의 화면이 됩니다. 이 공간에서는 빛·색·그림자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하나의 새로운 이미지로 완성되는 과정을 경험할 수 있어요.

이어지는 섹션 '모션 오브 쉐도우'는 움직이지 않는 오브제가 그림자를 통해 살아 움직이는 듯한 장면을 만들어내요. 사물은 제자리에 고정돼 있지만, 빛의 변화와 방향에 따라 그림자는 끊임없이 형태를 바꾸며 마치 생명력을 얻은 것처럼 움직이죠. 빈센트 발은 실제의 움직임이 아닌 시각적 착시와 빛을 통해 정적인 사물에 시간과 리듬을 부여합니다. 전시된 '양치의 중요성'은 빈센트 발이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받은 칫솔로 만든 작품이라고 해요. 어린 시절 BBC 채널에서 오래된 영화를 보면서 영화 팬이 된 빈센트 발은 두 편의 영화를 하나로 결합해 색다른 작품을 탄생시켰는데, 일곱 번째 섹션에 모아뒀죠. '사랑은 보라색 비를 타고'는 고전 영화 '사랑은 비를 타고'와 1984년 개봉한 영화 '퍼플 레인'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으로 두 영화가 더해진 포스터가 색다른 분위기를 자아내요. 그림자는 언제나 우리 곁에 존재하지만, 쉽게 주목받지 않죠. 빛이 있을 때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고, 사라지는 순간조차 조용합니다.
표지판을 보고 영국 추리소설 작가 애거서 크리스티 소설 속 한 장면을 연출한 ‘전방에 살인사건 발생구역’.
여덟 번째 섹션 '라이프 오브 쉐도우'는 바로 그 그림자의 존재를 통해 우리 삶의 모습과 감정을 이야기해요. 빈센트 발은 그림자를 단순한 시각적 결과물이 아니라, 삶을 비추는 또 하나의 언어로 바라보죠. 2022년 일어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보고 만든 작품 '전쟁은 이제 그만'이 이에 해당해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사건을 보고 자연스레 그 감정을 그림으로 옮긴 빈센트 발은 우크라이나 국기 색을 사용하고 그 위에서 인물들의 눈을 하얗게 표현했죠. 그 흰 눈동자 속에 절망과 공포, 그리고 인간의 무력감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이어지는 섹션 '쉐도우 오브 에브리데이'에는 일상에서 만난 그림자에 빈센트 발만의 유쾌한 시선을 더한 다양한 작품으로 구성돼 있어요. 그 가운데 '흐느끼는 벽'은 빈센트 발이 처음 서울에 왔을 때 우연히 녹슨 자국이 뭍은 벽을 보고 만든 작품이죠. 녹슨 자국이 무엇 때문에 생긴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벽을 따라 눈물이 흘러내리는 듯한 느낌이 마음에 든 그는 그림자 위에 여성을 그려 넣어 사연 있는 작품으로 완성했습니다. 이외에도 햇살이 드는 카페, 크레인, 기차 시트 등 일상 속 오브제를 활용해 만든 재치 있는 작품을 만나볼 수 있어요.
 빈센트 발은 한국 전시 만을 위해 한국 주방에서 많이 사용하는 집게와 한글, 태권도를 활용해 작품을 완성했다.
마지막 섹션 '스페셜 쉐도우'에선 한국의 전통 갓과 부채를 소재로 한 특별한 그림자 작업을 선보입니다. 오랜 시간 한국의 일상과 문화 속에 자리해 온 전통 오브제는 빛을 만나 새로운 이미지로 다시 태어났죠. 빈센트 발은 갓의 곡선과 부채의 펼쳐지는 형태에서 동양적 미감과 상상력을 발견하고, 그림자를 통해 전통과 현대, 문화와 유머를 자연스럽게 연결했습니다. 한국의 고유한 형태가 그림자라는 보편적인 언어를 통해 국경을 넘어 공감으로 확장되는 순간을 보여주는 이 섹션을 통해 관람객은 한국 전통의 미가 얼마나 아름답고 우아한지 몸소 느낄 수 있죠. 이처럼 평범한 그림자가 전혀 다른 세계로 이어지는 순간 관객은 예술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일상에 있다는 것을 깨달을 거예요. 우리가 매일 지나치는 빛과 그림자 속에 이미 작품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빈센트 발: 쉐도우그램(SHADOWGRAM)'
기간: 6월 14일(일)까지
장소: 서울 송파구 잠실로 209 뮤지엄 209
관람시간: 오전 10시~오후7시(매주 월요일 휴관, 입장은 오후 6시 마감)
입장료: 성인 1만8000원, 청소년·어린이 1만5000원



이보라([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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