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함께 살 때 명절이면 우리 집은 일가친척들로 북적거렸다. 장손이 아니어도 어른이 있는 집은 큰집이었다. 며칠 전부터 장을 보고 음식을 장만하느라 주방은 기름 냄새가 가실 틈이 없었다. 또 친척들이 돌아갈 때 음식 안겨 주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더러 성정이 뾰족한 형제가 비상한 기억력으로 분란을 일으키기도 했으니, 명절은 늘 시끄러웠다.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어린 시절의 부당한 대우에 대해 억울함을 토로하면 언쟁이 벌어졌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아이들은 온 집안을 뛰어다녔고, 울음을 터트렸으며 누가 더 세뱃돈을 많이 받는지 곁눈질했다. 내가 어린 시절의 명절을 혀로 기억하듯 장성한 조카들도 맛으로 추억했다. 이제 나의 형제들은 세상을 떠났고 엄마는 요양병원에 누워계신다.
며느리도 사위와 같은 백년손님
명절 차례 대신 함께 외식했더니
딸 걱정된 사부인 설 음식 싸보내
아들이 결혼하고 새 식구가 들어오면서 나는 명절 음식을 하지 않게 되었다. 여자들의 가혹한 노동은 나의 대에서 끝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같은 맞벌이임에도 여자라는 이유로 양쪽 집안을 뛰어다니며 명절 차림을 준비했던 나의 기억은 즐겁지 않았다, 사위가 백년손님이면 며느리도 당연히 그래야 했다. 그래서 아들 부부와 명절에 외식 후 카페에서 차를 마시고 웃으며 헤어졌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며느리의 친정, 나와 같은 세대인 안사돈께서 음식을 바리바리 보내온 것이다. 갈비찜에, 잡채에 각종 전까지 오색이 찬란했다. 나는 어안이 벙벙했는데 남도가 고향인 사돈은 딸을 시집보내고 노심초사했던 것 같다. 며느리에게 일을 시키지 않는 시모의 행태에 고심하다 직접 음식을 만들어 보냈으니 이건 전적으로 나의 불찰이었다. 감사와 함께 이러지 않으셔도 된다고 쓴 편지가 사부인을 더 혼란에 빠트렸다. 결과적으로 나는 사돈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딸을 시집보낸 친정 부모가 시댁 눈치를 보는 일은 과거의 잘못된 유물이다. 명절이 아니어도 갈비찜이나 전이 먹고 싶으면 언제든 해 먹을 수 있고 사 먹을 수도 있다. 기름진 음식을 자제하고 비만약이 불티나게 팔리는 세상이다. 부모를 모시고 살면서 명절이면 주방에서 헤어날 길 없던 우리 세대가 세상을 떠나면 달라지리라 믿는다. 물론 변화가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하나를 얻으면 또 하나를 잃는 게 세상의 이치가 아닌가. 문자의 발명이 암송 능력을 잃게 하고 내비게이션이 지도를 읽고 길을 찾는 능력을 퇴화시켰듯 키보드는 악필을 양산했다. 지금 나는 무엇을 잃은 걸까?
내가 좋아하는 백석의 시 ‘여우난골족’은 평안도 방언과 함께 친인척 대가족이 산골의 조부모 집에 모여 명절 밤을 지새우는 풍경이 그려진다.
“밤이 깊어가는 집안엔 엄매는 엄매들끼리 아르간에서들 웃고 이야기하고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웃간 한방을 잡고 조아질하고 쌈방이 굴리고 바리깨 돌림하고 호박떼기하고 제비손이구손이하고 이렇게 화디의 사기방등에 심지를 몇 번이나 동구고 홍게닭이 몇 번이나 울어서 졸음이 오면 아릇목싸움 자리싸움을 하여 히드득 거리다 잠이 든다 그래서는 문창에 텅납새의 그립자가 치는 아침 시누이 동세들이 욱적하니 흥성거리는 부엌으론 샛문틈으로 장지문틈으로 무이징게국을 끓이는 맛있는 내음새가 올라오도록 잔다”
나의 어린 시절에도 명절이면 큰집에 모여서 사촌들과 밤을 지새웠다. 새 옷을 입었고, 음식은 풍족했으며 세뱃돈에 심장이 콩콩 뛰었다. 꼬마는 자신이 부엌에서 일하는 여자 어른이 되리라 생각하지 못했다. 혈연적 유대로 맺어진 공동체의 따스한 기억만 남아있다. 우리 가족은 도시로 올라오면서 각자도생의 삶에 익숙해졌다. 남도에서 긴 세월을 보낸 나의 사부인에게 대가족은 여전히 현실일지 모르겠다. 같은 세대라도 성장 배경에 따라 생각이 달라진다. 며느리의 생각을 물어본 적이 없다. 시모 자리를 권력형 지위로 인식하는 구태가 남아있는 한 허심탄회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기본적인 나의 결정을 번복하지 않으려 한다. 다만 좀 더 긴 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가족끼리도 세대 간의 소통은 일방이 되지 않아야 한다. 봄이 오면 나는 사부인과 함께 유명 음식점에서 외식할 생각이다. 우리 세대의 여자들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우리 딸들에게 물려주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하여 말하려 한다. 아쉽지만 사부인의 음식이 정말 맛있기는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