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의 세운상가 재개발을 두고 논란이 뜨겁다. 서울시가 계획한 신축 건물의 높이가 종묘 경관을 해친다고 해 총리까지 나서 공개적으로 반대해서다. 또 이 건물이 들어서면 종묘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록이 취소될 수 있다고 으름장을 놓으니까, 강남과 강북의 균형발전을 꾀해야 하는 서울시의 입장도 난감하다. 이 일대는 오랫동안 강북의 중심지였는데 세운상가 일대가 슬럼화돼 개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 논란에서 중요한 게 하나 빠졌다. 이 일대는 600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서울의 대표적 상가인데 상권이 무너졌어도 관심 밖으로 밀려나서다. 이런 상권도 보존할 가치가 있는 게 아닐까?
위세 떨쳤던 시전 상인 종로 상권
세운상가 몰락했는데도 관심 끊겨
황제로 추존된 관우 모시는 동묘
재물운 때문인지 벼룩시장 성황
문화재 가치 지닌 동묘와 세운 상권
옛 모습 복원 시도해야 하지 않을까
조선 시대 한양도성의 안과 그 인근에는 세 곳에 시장이 있었는데 종로와 마포 그리고 서소문 밖 칠패 시장이다. 이 중에서 종로 시전의 역사가 가장 오래돼 한양 천도와 함께 시작되었다. 종로 시전은 종각 부근에 지은 행랑에 상인들이 입주하면서 관의 보호를 받으며 종로를 끼고서 성장하다가 동대문까지 그 영역을 확장했다. 이들은 궁궐과 관아는 물론이고 종묘의 제사 등에 물품을 대는 등 나라에 역(役)을 지고, 또 상업세를 내는 대가로 특정 물품을 독점적으로 판매할 권리를 얻었다. 대신 관은 허가 없이 물건을 파는 난전(亂廛)을 금지함으로써 이들의 독점판매권을 보장해 줘 사람들은 이들을 어용상인이라 불렀다.
구름처럼 사람 꼬이던 운종가 당시 종각 일대를 가리켜서 운종가(雲從街)라고 한 건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였다가 흩어져서이고, 육의전(六矣廛)이라고 부른 건 독점 판매 품목이 여섯 개로 무명을 파는 면포전, 종이를 파는 지전, 삼베를 파는 포전, 수입 물품을 파는 청포전, 비단을 파는 선전, 건어물을 파는 어물전 때문이다.
한양도성 안에서 시장을 종로 한곳으로 제한한 건 사농공상의 신분 질서 탓이다. 이 신분 질서에 따르면 상인이 가장 아래인데 농사짓는 농민이나 공산품을 제작하는 공인과 달리 곡식과 물건 등을 생산하지 않고 오로지 거래를 통해 이윤을 창출해서다. 그래서 시장 숫자를 가급적 늘리지 않으려고 한 게 조선 조정의 일관된 정책이었다. 그렇지만 이윤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욕구를 막을 수 없는 데다 인구 증가와 도시화에 따른 상인의 증가가 불가피해지면서 종로 시전의 독점판매권이 깨졌다. 그래서 마포를 중심으로 한강 변을 따라 새로운 시장이 형성되고, 남대문 바깥에도 칠패시장이 들어섰다.
마포시장은 삼남 지방에서 배로 운송된 물건들이 집결하면서 형성되었다. 그리고 칠패시장은 한양의 남쪽 통로인 과천 신원(新院)과 동작나루, 또 서쪽 통로인 행주와 서강을 통해 형성됐는데 나중에 남대문시장으로 흡수되었다. 그런데 남대문시장이 현 위치에 들어선 건 대동미를 보관하던 선혜청 소속의 창고 때문인데 북창동과 남창동이란 이 일대의 동명에서 그 흔적이 찾아진다. 동대문시장은 한양의 북쪽 통로인 양주의 퇴계원과 다락원 그리고 파주의 송우점, 또 동쪽 통로인 송파와 삼전나루를 거쳐서 뚝섬과 왕십리를 통해 형성되었다. 동대문 부근에 광장시장과 동대문 패션상가가 있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한편 지하철 1호선 동대문역과 신설동역 사이에는 동묘역이 있다. 동묘(東廟)는 동관왕묘를 줄인 말인데 관왕은 삼국지에 나오는 관우이다. 이곳은 한때 관제묘로도 불렸는데 고종이 구한말 황제로 등극하자 관우에게도 ‘현령소덕의열무안관제(顯靈昭德義烈武安關帝)’라는 시호를 내려 그가 황제로 추존되어서다. 이 시호는 지금도 동묘에 현판으로 걸려 있다. 고종이 이렇게까지 관우를 추존한 데는 동묘가 무묘(武廟)로서 성균관 문묘와 나란할 정도로 격이 높아서다. 그래서 춘추로 치러지는 대제(大祭)에는 역대 왕들이 무복(武服)을 입고 동묘를 방문해서 참례했다.
그런데 한양에는 동묘만 있지 않고 북묘·남묘·서묘를 포함해서 총 네 개의 무묘가 있었다. 이 무묘들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들이 관우의 혼령으로 일본군을 격퇴했다고 주장해 이들의 요청으로 전쟁 직후인 1601년부터 세워졌다. 그런데 조선 조정이 오랫동안 문(文)을 숭상해 와 무묘를 짓는데 혹시 늦장 피울까 봐서 조선에는 문묘는 많아도 무묘가 없어 일본의 침략에 취약했다고 윽박지른 탓에 조선 조정은 무묘를 서둘러서 지어야 했다. 이 중에서 동묘는 조선과 명나라와의 우호를 다짐하며 가장 크고 멋지게 지어 수준 높은 문화재로 남았다.
지금은 동묘만 있고 나머지는 없다. 북묘는 서울 과학고 옆에 있었는데 송시열이 살던 집과 가까웠다. 고종 때 진령군이라는 무당이 여기에 북관왕묘를 다시 세웠는데 갑신정변 때 고종 내외가 비원 담을 넘어 여기로 피신했다. 진령군은 임오군란 때 명성왕후가 장호원으로 피신하자 이때를 계기로 고종 내외의 측근이 된 여자이다. 서묘는 독립문 아래 천연동에 있었는데 지금은 흔적조차 없다. 남묘는 남대문경찰서 뒤쪽에 있었는데 명나라 유격장 진인(陳寅)이 울산 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여기서 치료를 받고 완치되자 관우의 혼으로 살아났다고 해 여기에 세워졌다. 지금은 철거돼 1955년 사당동에 새롭게 조성되었다.
중국인에게 관우는 재물의 신
그런데 중국인 집에 가면 비록 작아도 관우 제단을 발견할 수 있다. 사업하거나 장사하는 사람의 집에선 특히 그러한데 중국인에게 관우는 재물의 신을 의미해서다. 관우는 무장인데 어째서 재물의 신으로서 받들어질까? 이를 알기 위해선 춘추전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지금의 산서성(山西省) 일대는 춘추전국시대 때 진(晉)나라였는데 이곳 남서쪽 끝에 해지(解池)라는 호수가 있는데 이 근처가 관우의 고향이다. 이 호수는 유명한 소금 산지로 한때 중국인들이 소비하는 소금의 70%까지를 생산했다. 이 소금이 중국 각지로 팔리자 이곳에 부호들이 많이 생겨나면서 여기가 진상(晉商)의 기원이 되었다.
한국인은 진상을 곧잘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한다. 커피 한 잔을 시키고 자리를 오래 차지해 본전을 제대로 뽑는 손님을 가리켜서 진상이라 해서다. 반면 중국에선 우리와는 달리 좋은 의미를 지니는데 이들의 신용도가 높아서다. 이런 높은 신용도로 북쪽 오랑캐인 북융이 쳐들어올 때마다 진상은 전쟁 물자를 공급하고 그 대금을 나라에서 지불받았다. 이 과정에서 또다시 돈을 많이 벌어 청나라 서태후조차 이화원(頤和園))을 지을 때 모자란 자금을 진상에게 돈을 빌려서 완공했을 정도다. 또 이들은 중국 전역을 상대로 장사를 해 어음을 발행해야 했는데 이 어음의 신용도가 절대적인지라 중국에선 은행이 따로 필요 없었다.
중국에는 진상에 버금가는 휘상(徽商)도 있다. 안휘성(安徽省)은 안주와 휘주가 합쳐져서 생겨난 성인데 휘상은 휘주 상인을 말한다. 휘주는 전통적으로 가난한 지역이라 사내아이는 10세 초중반만 돼도 장강을 맨몸으로 내려가 물산이 풍부한 남경(南京)에서 돈을 벌었다. 그리고 돈을 벌면 고향에 경쟁적으로 집을 멋지게 지어 이 집들은 현재 유네스코 문화유산이 되었다.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朱元璋)도 휘상의 이런 자금력을 바탕으로 해서 거지에서 황제가 될 수 있었다. 그래도 휘상의 명성은 진상만 못 한데 대부분의 중국인이 집에 관우 제단을 설치해 진상이 하는 것을 따라 해서다.
지하철역에서 내려 동묘로 이동하려면 이 일대는 벼룩시장 등으로 늘 북적인다. 규모는 작아도 동묘를 중심으로 상권이 잘 발달 돼 있어서다. 그래서 동묘를 지은 애초 목적과는 크게 달라졌지만, 재물의 신으로 받들어지는 관우의 신통력이 여기서 힘을 발휘하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든다. 동묘 일대는 이런 재미난 얘깃거리가 있는 데다 ‘현대판 운종가’가 되었으니 역대 죽은 왕들의 혼을 모신 종묘 못지않게 문화재적 가치를 지니는 게 아닌가. 세운상가도 한때는 미사일까지 만든다고 해 서울 시민들이 즐겨 찾던 전자상가였는데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어 안타까운데 이런 건 복원 대상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