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유령이 온 세상을 배회하고 있다. ‘어포더빌리티(affordability·필수 생활비를 감당할 수 있는 지출 여력)’라는 이름의 유령이.
일시적인 고물가의 고통이 아니다. 필수적인 지출이 소득을 압도해 살림의 균형이 깨지는 현상이다. 평범한 삶 자체가 가능한가에 대한 구조적 문제다. 이제 정치 의제는 '성장이냐, 분배냐'의 논쟁이 아니라 ‘제대로 살 수 있느냐’가 됐다. 품격은 떨어지지만 이를 직관적으로 표현한 게 ‘먹사니즘’ 아닌가 싶다.
이번 인플레이션은 화폐적 현상을 넘어 생계의 위기로 체감되고 있다. 장바구니와 외식비는 체감상 먼저 생활을 조여왔고, 서울의 집값은 계층 사다리의 구조적 장벽으로 인식됐다. 지갑에서 나가는 돈을 조금 줄여주는 정도론 수습하기 어려운 지경이다.
시작은 코로나19 대책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멈춰 선 경제를 살리기 위해 초대형 재정지출과 금융완화가 동원됐다. 미국을 예로 들어보자. 2020년 말 트럼프 정부가 9000억 달러, 이어 2021년 초 바이든 정부가 1조9000억 달러의 재정을 잇달아 풀었다. 경제학자 올리비에 블랑샤르에 따르면 2021년 미국경제의 수요 공백(산출갭)은 최대 9000억 달러로 추정됐다. 갑자기 3배에 달하는 돈이 풀렸으니 인플레의 땔감이 깔린 셈이다.
여기에 전쟁, 공급망 붕괴, 주택 공급 감소, 저금리 등이 겹쳐 물가고를 넘어 필수 생활비의 문제로 굳어졌다. 1985년 가구 연소득의 평균 3.5배였던 미국의 주택 가격은 요즘엔 5배가 넘는다. 외식비도 크게 올라 LA 코리아타운에서 두 명이 칼국수를 먹으려면 50달러쯤 있어야 한다. 유럽의 베를린·암스테르담·파리 등 인구가 집중된 도시에선 가처분 소득의 40% 정도가 주거비에 들어간다. 유럽연합(EU) 집행위는 역내 전체의 3분의 1에 달하는 약 8200만 가구가 과중한 주거비를 부담하고 있다고 본다. 일본의 경우 2022~23년 원자재 가격 상승에다 엔저가 겹쳐 인플레가 시작됐다. 외국 관광객들은 엔저 덕에 일본 물가가 싸다고 느끼지만, 일본 소비자들은 죽을 맛이다.
한국의 물가는 일부 품목에선 국제수준을 웃돈다. 인플레 압력에 더해 복잡한 유통구조와 이런저런 규제들이 비용을 차곡차곡 얹혀졌다. 고비용 체질이 굳어져 생산활동의 효율도 떨어졌다. 플라자 합의 이후 일본인들이 겪었던 내외 가격차(국내 가격이 외국보다 비싸진 현상)를 지금 한국 소비자들이 겪고 있다.
물가를 잡아야 한다는 압박은 언제나 선거를 앞두고 가장 커진다. 정부는 시장의 자율 조정을 기다리지 못하고 먼저 가격표를 때리곤 한다. 집값을 잡기 위해 초강력 부동산 세제가 예고돼 있다. 공정거래위원회·국세청·검찰 등도 물가 대응에 나섰다. 또 최근 정부 합동점검반은 바가지 요금 현장점검을 나섰다. 명절을 앞두고 자주 보던 풍경이다.
그러나 잠시 관점을 바꿔 보자. 코로나19 사태 때 대구와 수도권의 의료진 부족으로 정부가 평소의 몇 배에 이르는 수당을 제시했지만, 이를 바가지나 폭리라 하진 않았다. 공급이 절대 부족한 상황에서 가격은 탐욕이 아니라 인력을 끌어오는 신호였다. 다른 분야에서도 대체로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인플레를 탐욕 탓으로 돌려 ‘그리드플레이션(greedflation)’이라는 말도 나왔다. 경제학자 브라이언 알브레히트가 말했듯, 이는 비행기 추락을 중력 탓으로 돌리는 것과 같다. 인간의 탐욕은 늘 있었다. 공권력이 이를 탓하는 순간 시장은 가격보다 권력의 의중을 먼저 읽는다.
물론 소관 부처별로 불합리하게 높아 보이는 몇몇 가격을 끌어내릴 순 있을 것이다. 이미 제분업체들이 밀가루 가격 담합으로 걸렸다. 소비자들이 그 혜택을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군가의 소득은 누군가의 비용이라는 사실엔 변함이 없다.
한국만 그런 건 아니다. 경제에 정치가 끼어들면 더 큰 문제를 키우곤 한다. 물가와 소득, 그리고 성장을 고려해 조심스럽게 풀어야 할 일인데도 단기간에 가시적인 결과를 중시한다. 사례는 넘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1월 8일 기관투자가의 단독주택 매입을 금지하는 행정명령을 내놨다. 9일엔 신용카드 금리를 연 10%로 제한하겠다고 했다. 이어 10일엔 주택 대출금리를 낮춘다며 정부주택금융기관(GSE)에게 2000억 달러 규모의 주택저당증권 매입을 지시했다.
하나하나 부작용을 수반하는 정책이다. 기관의 주택매입을 막으면 임대 물량이 줄고, 금리를 묶으면 저신용자가 시장에서 밀려나며, GSE의 개입은 인플레를 더 자극할 수 있다. 셋 다 과거 민주당의 공약이었다. 그래도 하겠다는 건 선거를 의식한다는 뜻이다. 미국의 보수 매체 내셔널리뷰는 생활비 부담 경감을 위한 정치권의 총력전을 ‘어포더빌리티 포퓰리즘’이라고 표현했다.
유럽에서도 가격 통제는 손쉬워 보이지만 위험한 처방이다. 2022년 영국의 리즈 트러스 총리는 에너지 가격 상한제를 실시하면서 재정으로 보전해줬다. 여기에 대규모 감세안까지 발표하자 파운드화가 폭락하며 금융시장이 대혼란에 빠졌다. 생활비를 잡겠다는 명분 아래 재정 건전성과 시장 신뢰를 동시에 놓친 것이다. 결국 그는 45일만에 조기 퇴진했다.
당장의 생계비를 낮춰주려다 정책이 역주행하기도 한다.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 일본 총리는 지난 총선에서 식료품 소비세를 2년 간 면제하겠다고 공약했다. 소비자 입장에선 반갑겠지만, 수요 진작 효과를 지닌 감세는 물가대책과 상극이다.
가격은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다. 물가만 내려가면 실질소득과 생활수준이 자동적으로 높아진다는 생각은 착각이다. 일반적으로 물가하락은 명목소득의 감소를 동반한다.
이를 오해하다 좌절한 게 1994년 5월 일본 하타 쓰토무(羽田孜 1935~2017) 총리의 실질소득 배증계획이다. 5년간 물가를 20~30% 낮춰 실질소득을 증가시키겠다는 내용이었다. 이를 위해선 연 4~5%의 디플레를 일으키며 경제를 매우 효율적으로 망가트려야 한다. 관료들의 만류로 없던 일이 됐다.
물가가 높아진다고 가난해지고, 낮아진다고 부유해지는 게 아니다. 가격 통제에 큰 의미를 둘 수 없다는 얘기다. 2022년 시카고대가 경제학자들에게 ‘가격 통제가 인플레를 억제하나’라는 설문조사를 한 결과 65%가 ‘동의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또 비상시 정부에 가격통제권을 부여한 상원의 ‘폭리방지법’엔 84%가 반대했다.
원론 상 단기적인 인플레엔 통화와 재정의 영향이 크다. 하지만 생활비 위기를 장기적으로 구조화하는 건 생산성과 공급의 정체라고 볼 수 있다. 고물가 탓만 하는 건 단편적이다.
원래 물가는 선진국이 될수록 비싸지는 법이다. 제조업 생산성이 급상승하면서 임금이 높아지면 생산성이 정체된 서비스업의 임금도 덩달아 오른다. 이 때문에 주거비를 비롯해 교육비·외식비 등 서비스 가격이 두루 비싸진다. 한국이 그렇다. 삼성전자의 반도체 공장은 해마다 생산성이 뛰지만, 머리 다듬거나 아이 돌보는 일의 효율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늘 같은 질문으로 돌아온다. 왜 이렇게 열심히 사는데도 살림은 나아지지 않을까. 선진국의 생활비 부담 위기는 물가보다 생산성 문제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이 현상을 설명하는 경제학 이론은 이미 확립돼 있다. 보몰의 비용병(Baumol's Cost Disease), 발라사-사무엘슨 효과(Balassa-Samuelson Effect)가 그런 내용이다. 핵심은 제조업과 비제조업의 생산성 상승률의 격차다. 비제조업 생산성 상승률이 제조업에 가까워지면 내외가격 차가 축소되고 생활이 좀 더 여유로워진다고 한다. 내외가격 차가 해소돼서가 아니라 생산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결국 생활수준이 높아지려면 생산수준이 높아져야 하고, 이를 위해선 생산성이 상승해야 한다.
말은 쉽지만, 시간이 오래 걸리고 힘도 많이 드는 일이다. 규제 완화, 공급 확대, 노동시장 개혁, 이민 제도 손질처럼 정치적 저항이 큰일이 수두룩하다. 몇 년마다 돌아오는 선거 때 성과를 보여야 하는 정치가 이 길을 택하긴 쉽지 않다. 그렇기에 가격표를 먼저 건드리며 ‘어포더빌리티 정치’를 하는 것 아닐까.
그런 면에서 1971~73년 닉슨 정부의 가격위원회 의장 잭슨 그레이슨(1923~2017)의 진단은 경청할 만하다. 그는 퇴임 후 가격 통제가 경제에 미친 7가지 폐해를 지적했다. 자원배분 왜곡, 경제 펀더멘털 교란, 이익 메커니즘 마비, 시장 경쟁 실종… 가격 통제의 최고 책임자로서의 반성이었다. 민간의 생산성 향상이 답이라고 판단한 그는 1977년 휴스턴에 미국 생산성본부(APQC)를 설립했다. 그가 환생해 빌 클린턴의 화법을 쓴다면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문제는 생산성이야, 바보들아.
‘더 롱뷰(The Long View)’는 멀리 보고, 깊게 생각하는 독자를 위해 준비했습니다. 경제 이슈의 본질과 맥락을 파고듭니다. 중앙일보 편집국장을 지내고, 현재 미주 중앙일보 대표를 맡고 있는 남윤호 대기자가 사안을 꿰뚫는 날카로운 관점을 제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