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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시조 백일장 - 2월 수상작] 뱅쇼

중앙일보

2026.02.24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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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
뱅쇼
하여진

리큅에 바짝 말린 소한이 돌아올 때
사과와 오렌지와 시나몬 스틱 하나
포도주 알알이 익은 빛 온몸으로 번진다
겹겹이 우러나온 꽃과 새와 빛과 별
혀끝에 닿을 듯한 기억은 새콤달콤
하이빔 솟구치는 맛 끝도 없는 뿔이 뚝
이별은 묵을수록 모양을 잃어갈까
대본에 없는 함박눈 흐린 창가 쌓이고
청귤칩 하나 건져낸 당신은 증발한다
잘 가라 끓여 마신 지독했던 이름하나
불어터진 별빛과 달빛이 가득한 밤
땀방울 맺힌 미련에는 증오가 약이 된다

◆하여진
66세. 조선대학교 문예창작과 학·석사 졸업. 조선대학교 국어국문과 박사과정 수료. 2009년 시인세계 등단. 시집 『Itaewon 곰팡이꽃 풀 옵션』

차상
짧아지는 봄날을 읽는다
백인우

겨울을 꼬집으면 봄 살갗이 뜯어진다
고요하게 재잘대는 저 초록의 입술들이
몇 마디 던져놓으면
들판들이 물어간다

산나물 씹어보면 파릇한 페이지에
머리말 읽자마자 따라온 아지랑이
길 위에 밑줄을 치며
책장 사이 껴든다

휙 하고 통과하는 고속철도 뒷모습에
땅 위에 누워버린 연약한 개나리꽃
바짓단 사이사이로
깍지 한 번 껴본다

차하
돌돌돌
백재순

세모도 날이 있고 네모도 가시가 돋아
구르는 물길 따라 모서리 으깨어서
둥글게 살고 싶은 꿈 강가에 펼칩니다

어쩌면 산다는 건 어깨를 부딪히며
바윗돌 호박돌 조약돌이 돼 가는 것
공깃돌 모래가 되어 세상 끝에 서는 것

별자리 더듬으며 물살에 턱을 넘고
여울목 굽이치며 낙수에 부서져도
강 자락 약솜에 젖어 상처마저 윤이 납니다

이달의 심사평
시조의 현대성은 참신한 주제를 넘어 이를 구현하는 기교적 구성과 전개에 있다. 이번 달에는 새로운 보법을 찾으려는 시도와 소재 활용의 묘미에 주목하며 작품들을 살펴보았다.

장원 하여진의 ‘뱅쇼’는 와인을 끓이는 과정에 이별의 상처를 치유하는 서사를 탄탄하게 결합했다. 재료를 준비하며 기억을 소환하고, 액체의 증발과 함박눈의 대비를 거쳐 “증오”라는 처방으로 감정의 정화를 이루는 구성이 돋보인다. 미각과 시각을 결합한 감각적 묘사와 비유가 탁월하다. 음보의 불안정함이 일부 보이지만, 사랑의 반대급부를 통한 치유라는 독특한 시각은 매우 현대적이다.

차상 백인우의 ‘짧아지는 봄날을 읽는다’는 계절의 이행을 ‘독서’라는 행위로 치환한 감각이 빛난다. 겨울을 꼬집어 봄의 살갗을 얻는 도입부터 산나물을 페이지로 읽어내는 비유가 정밀하다. 봄의 풍경을 유기적 상징체계로 엮어내며 고속철도의 속도감과 개나리의 연약함을 대비시킨 점이 주목된다. 차하 백재순의 ‘돌돌돌’은 모난 돌이 조약돌이 되는 과정을 인생의 섭리에 빗댄 수작이다. 의성어 ‘돌돌돌’을 활용해 경쾌한 리듬을 살렸고, 시련의 흔적인 상처를 “윤”으로 변주한 따뜻한 시각이 인상적이다. 다만, “어쩌면 산다는 건”과 같은 다소 익숙한 전개 방식은 아쉽다. 자신만의 고유한 문법을 찾아가는 그 정진의 길을 응원한다.

심사위원 이송희(대표집필)·이태순

초대시조
꽃을 이끌고 가야지
임영숙

한 그루 나무에서 만 그루의 어둠이 살아
벌레 먹은 나뭇잎 그 사이로 별이 떴다
가을은 붉은 내력을 벗은
불꽃들의 집합체

맺혀있는 물방울에 무지개도 걸리고
근육질 가지마다 보석이 반짝인다
자신의 뿌리 끝 영혼을
향해가는 순례의 시간

◆임영숙
경기 용인 출생. 2014년 ‘나래시조’ 신인상 등단. 시조집 『풀잎의 흔들림이 내게 건너왔으니』, 『들판 정치』. 한국시조시인협회 신인상, 젊은시인상, 나래시조문학상, 전영택문학상 등 수상.

언어가 가름해놓은 계절이라는 이름 중에 가을만큼 오묘한 계절이 또 있을까. 아름다운가 하면 쓸쓸하고 화려한가 하면 추레한 시간이 가을 속에 있어 우리는 총체적인 사색의 길로 접어든다. 그러기에 “벌레 먹은 나뭇잎”에서 “별”을 찾고 작은 “물방울”에서 “무지개”를 보는 게 아닐까 싶다. 그러나 가을은 무정한 계절이기도 하다. 여름이 활짝 피워 올린 꽃들을 하나둘 떨구게 하고, 눈부시던 것들이 빛을 거두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가을은 아름다움의 절정이면서 동시에 소멸의 시작이리라.

“한 그루 나무”에도 “만 그루 어둠”이 사는 가을이, “꽃”을 이끌고 어딘가로 간다고 작가는 말한다. 그의 뒷모습은 순례자처럼 고단하지만, 그나마 참 다행인 것은 계절은 다시 그 자리로 돌아온다는 사실이다. 우리 삶도 그렇지 않을까. 절망이 밀려오다가도 어느 순간 우리는 다시 일어설 힘을 찾아내니 말이다. 작가는 끝이 아니라 순환을, 상실이 아니라 귀환을 말하고자 했으리라 짐작해본다. 더불어 “문학은 오독(誤讀)이 아닌 이독(異讀)이 있을 뿐”이라는 말에 기대었음을 조심스레 적어본다.

시조시인 강정숙

◆응모안내=매달 18일까지 중앙 시조 e메일([email protected])으로 접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우편(서울시 마포구 상암산로 48-6 중앙일보 중앙시조백일장 담당자 앞)으로도 받습니다. 등단하지 않은 분이어야 하며 3편 이상, 5편 이하로 응모할 수 있습니다. 02-751-5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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